요즘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물류대란’과 15일에 있을 한미정상회담이다. 그리고 그 두 현안에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말’이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다. 물류대란은 노 대통령의 ‘친노(親勞) 발언’이, 한미정상회담은 ‘친미(親美)적이지 않은 발언’이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방문 중인 노 대통령도 물류대란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 바쁜 일정 중에서도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 청와대와 내각에 엄정 대응과 피해 최소화를 지시했다.
그런데도 혼란은 더해가고 있다. 더욱이 청와대, 총리실, 관계부처 장관 등 어느 누구도 이번 사태가 언제, 어떤 식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를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정부의 위기대응 시스템이 마비됐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 이 모양이 됐을까. 모든 책임을 노 대통령에게 떠넘길 수는 없다. 그러나 초기 대응에 실패한 데는 노 대통령의 노사관이 크게 작용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노 대통령의 ‘코드’에 맞추려다 보니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지적이다.
노사 문제에 대한 노 대통령의 ‘코드’는 분명했다. 그는 1일 MBC 100분 토론에서 노동정책을 얘기하며 “불신이 많은 사회이지만, 노무현을 못 믿으면 또 믿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고 말했다. 2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방문해서는 “현재는 경제계가 힘이 세지만 앞으로 5년 동안 이런 불균형을 시정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들 발언은 노 대통령이 노동자의 편에 설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실제로 두산중공업과 철도분규는 노동자측의 완승으로 끝났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부 각 부처는 화물연대의 파업을 ‘용인할 정도’라고 쉽게 생각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그 대가를 지금 나라 전체가 톡톡히 치르고 있다.
방미 활동만 해도 그렇다. 노 대통령은 미국에서 ‘예상 밖의 말’을 쏟아내고 있다. “이번 방문에서 목전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 2사단이 현재의 위치에서 한국을 도와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할 생각입니다.”
“북한은 핵물질을 완전히 폐기하고 국제기구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53년 전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 발언에는 그동안 노 대통령이 보여 온 ‘반미 좀 하면 어떠냐’ ‘대등한 대미관계를 주장하겠다’ ‘북핵 문제는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는 ‘의지’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미국을 인정하고, 미국의 선택을 존중하며, 미국과 모든 것을 협의하겠다”는 뜻만이 읽힌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지금까지 노 대통령 자신이 발언한, 그 때문에 미국이 갖게 된 부정적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다. 이도 노 대통령 스스로가 선택한 변화다. 차라리 그동안 말을 절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앞으로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달라진 듯한 노사관이나 미국관을 그대로 유지해 나갈 것인지가 또다시 주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대통령의 말 때문에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국가적, 국민적 코스트를 치러야 할지 모른다.
노동계에서는 이미 노 대통령의 노사관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를 지지했던 상당수의 사람들은 노 대통령이 대미 저자세 외교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앞으로 노 대통령의 선택이 힘들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선택의 기준은 분명하다.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국익을 기준으로 삼으면 된다. 대통령은 국익의 최고 대변자이자 수호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심규선 정치부장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