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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보니]황용성/“머리 염색해야 축구 잘하나…”

입력 | 2003-02-07 18:27:00


한때 알제리대 축구선수였던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축구에 열광하는 현대인을 ‘축구라는 종교의 신도’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또 그가 그라운드를 성전(聖殿)으로, 스타플레이어를 카리스마적인 종교지도자로 비유한 것도 재미있다. 축구선수의 일거수 일투족이 일반인의 주목 대상이 되는 요즘 카뮈의 말이 실감난다.

가깝다고는 하나 역시 산 설고 물 선 이국 땅인지라 3년 전 아들 곁을 찾아 일본에 건너온 90세 노친(老親)의 유일한 낙은 TV로 가끔 방영되는 축구경기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축구에 관한 논쟁이라면 80여년차가 나는 손자들과 한치의 양보도 없다. 가령 아이들이 “야, 베컴이다, 프리킥 솜씨 정말 끝내주네”라고 호들갑을 떨면 “베컴인가 베칼인가 하는 아이 볼 차는 솜씨라야 별 거 아니던데 웬 난리들이야. 볼 몰고 가는 솜씨는 안정환이가 한 수 위 아니냐?”라며 싸움을 건다.

노친은 일본프로축구 J리그 ‘시미즈 S 펄스’ 소속으로 활약 중인 안정환 선수의 열렬한 팬이다. 언젠가 머리를 길러 단정하게 묶은 모습을 한 번 보고는 그만 팬이 됐다. 사내아이가 어릴 때에는 머리를 땋고, 장성하면 상투를 틀어 관을 쓰게 했던 한국의 전통 속에 자연의 섭리에 순응했던 선인의 지혜가 깃들여 있다고 믿는 노친에게는 안 선수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작년 월드컵 때의 일이다. 노란색 은색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인 일본 선수들이 TV에 비칠 때마다 노친은 혀를 끌끌 찼다. “어허, 내 눈이 침침해져서 그러나. 쟤들이 꼭 원숭이 같아 보이는구나. 제 근본을 잃고 딴 정신에 사는구나” 하며 탄식했다. 그후 한국 선수들 가운데서도 이런 모습이 많아지자 노친은 더없이 시무룩해 했다. 노친은 ‘세상이 모두 변했는데 더 이상 말해 뭐 하겠느냐’는 생각에서인지 이제 개탄하지도 않는다.

예부터 한국 어르신들은 장성해 가는 자식들의 머리를 빗겨주며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것을 큰 기쁨으로 알았다. 어릴 적 내 고향에서는 혼담이 오갈 때 중매쟁이가 규수의 머리카락을 신랑이 될 사람의 집에 전해 주었다. 규수의 머리카락이 바르고 청흑색이면 앞으로 태어날 자식이 바르고 공손하다 하여 좋은 규수감으로 꼽혔다. 반면 머리카락이 바르지 못하거나, 머릿결이 노랗거나 붉으면 그 규수가 낳을 자식들의 심신이 건강하지 못할 것으로 알았다. 봄에 자라나는 초목의 잎이 곧고 무성하면 열매 또한 충실하듯 사람 또한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국제결혼이 흔한 요즘에야 통할 말이 아니지만.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선생이 을미년 조정의 단발령에 반대해 올렸던 상소에서 “신의 머리는 끊을 수 있거니와 신의 머리카락은 끊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을 유교적 가치관의 단순한 고수만으로 보고 싶지 않다. 조상의 아름답고 지혜로운 정신을 지키려 했던 단호한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싶다.

월드컵 4강, 한국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머리카락을 물들이는 따위의 어설픈 ‘프로’ 행세는 이제 집어치웠으면 한다. 유구한 세월을 통해 어르신들이 우리의 사지백체(四肢百體)에 심어준 자연적 삶, 야성적 삶의 상징인 곧은 머리카락. 안정환 선수가 곧은 머리카락을 훨훨 날리며 골을 집어넣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황용성 일본 '동아시아 전승문화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