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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헐리는 古宅, 사라지는 '문화의 흔적'

입력 | 2003-01-28 19:19:00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고택. 이미 상당부분 훼손된 이 고택은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종승기자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한 낡은 한옥 앞. 문화연대, 한옥사랑시민모임, 도시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 몇 명이 모여 발표문을 읽어 내려갔다.

“나이를 먹은 도시는 나이에 걸맞은 다양한 흔적과 기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서울은 오랜 과거와 최근 시간의 흔적밖에는 없다.”

이 한옥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1886∼1965)이 32세 때인 1918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직접 설계해 지어 41년간 살았던 집. 시민단체 회원들은 이날 이 고택의 보존, 복원을 요구하며 서울시가 이 집을 서둘러 매입할 것을 촉구했다.

지난해 6월 한 기업이 디자인연구소를 건립하기 위해 인근 가옥들과 함께 이 집을 매입했다. 기업은 지난해 9월 종로구청에 건축 허가를 신청했지만 “건축 양식 등을 고려할 때 창덕궁 등 주변 경관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얼마 후 이 집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기업에서는 고택을 서울시에 매각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매입 가격 문제로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기업측은 “행정소송을 해서라도 권리를 찾겠다”는 태세다.

이에 앞서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1890∼1957)의 고택 ‘소원(素園)’이 철거됐고 27일 새벽에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연신원) 건물이 ‘기습 작전’을 감행하듯 철거됐다.

최남선 고택이 철거된 것은 서울시가 문화재 지정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연세대 연신원 철거는 학교측의 ‘개발 논리’에 밀린 것이다.

로마 베네치아 런던 파리 등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는 그 도시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각종 양식의 건축물이 잘 보존돼 있다. 한 건물에 시대별 양식이 혼재돼 있는 경우도 많다. 600년의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진 서울은 하지만 불과 100년 전의 건축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유럽의 궁궐에 왕족이 살고 있거나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 궁궐은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다.

고옥(古屋)들의 철거를 쓸쓸하게 지켜보면서 우리가 새 것을 추구하다가 더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