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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열풍의 허와 실]①영어 학습 백태

입력 | 2002-02-04 18:40:00


《젖먹이부터 직장인까지 온 나라가 ‘영어 학습 열풍’에 휩싸여 있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 해외 어학연수를 보내고 혀 수술까지 하는 등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투자하고 있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벙어리 영어교육’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 영어교육의 실태를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3회에 걸쳐 게재한다.》

회사원 K씨(35)는 최근 2년 동안 한달에 40여만원을 내고 7살 난 딸을 유아 영어학원(영어 유치원)에 보냈다. 조기 영어교육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놀이방 친구들이 모두 영어학원에 다닌다”는 아내의 성화 때문이었다.

K씨는 “남들은 영어에 중국어 일본어까지 배운다는데 영어라도 배우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아 학원에 보낸다”며 “영어 단어를 간신히 읽는 수준이라 영어를 제대로 배운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회화 중심의 실용 영어 능력이 중시되면서 한글도 떼지 못한 유아에서부터 대학생 직장인까지 영어학습 열풍에 휘말려 있다.

서울 등 수도권 지역 영어 유치원의 경우 일반 유치원보다 수업료가 2∼3배나 비싼 40만∼80만원 정도지만 몇 달을 기다려야 입학이 가능할 정도로 붐비고 있다.

초중고생 출국 현황

분 류

96년

97년

98년

99년

2000년

적법유학

56

399

433

189

669

편법유학

3,517

2,880

1,129

1,650

3,728

최근에는 아예 미국 공립학교 교과서를 교재로 사용하는 초등학생 대상 영어학원이 서울 강남구 청담동, 논현동, 대치동 등 강남과 수도권 지역에 10여 군데나 생겨났다.

또 영어로 아이를 돌보는 ‘베이비 시터’까지 등장했다. 영어를 구사하는 베이비시터를 구해 6살 난 아들을 맡긴 주부 안영남(安影南·33·경기 부천 원미구)씨는 “영어 유치원은 한달에 80만원까지 드는데 비해 영어를 구사하는 베이비시터는 시간 당 1만5000원이고 개인 교습이 가능해 장점이 많다”고 말했다.

아예 원어민 가정교사를 들여 놓고 영어를 가르치는 가정도 있다. 원어민 가정교사 알선업체인 ‘튜터링 코리아’에 따르면 원어민 가정교사를 고용하려면 6개월에 810여만원 정도가 드는데도 현재 강남과 신도시 지역의 10여개 가정이 원어민 가정교사를 들여 놓았고 현재 10여 가정이 대기 중이라는 것.

혀와 혀 밑바닥을 연결하는 막(설소대)를 절개하면 혀가 길어져 R과 L 발음을 잘할 수 있다고 믿는 학부모도 있어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Y병원에는 하루 5건의 수술 신청이 접수되고 있고 실제로 하루 1, 2건씩 수술이 이뤄진다는 것.

그러나 조기 영어교육으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찮다. 한국아동상담센터 정희정(鄭姬靜) 소장은 “어릴 때 영어 비디오를 너무 많이 봐 영어로 중얼거리면서도 한국말을 못하는 어린이의 상담이 많다”며 “3세 이전에 영어 비디오 등을 지나치게 많이 보면 우리말 습득이 늦어지는 등 언어발달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방학 등을 이용한 초중고생의 단기 해외 어학연수도 늘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에 따르면 어학연수를 떠난 서울 시내 초중고생은 2000년 겨울방학에 1285명이었지만 지난해 여름방학에는 4059명으로 3배 이상 늘었다.

최근에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영어를 배우는 ‘영어 로봇’과 ‘영어 인형’까지 등장했다. ‘영어 로봇’은 학습프로그램 칩을 포함해 개당 가격이 100만원을 넘는 고가지만 주문하고 20여일을 기다려야 물건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수요가 폭발적이다. 지난해에는 1개에 20만원이나 하는 영어로 말하는 강아지와 곰 인형도 출시됐다.

회사원 이미정(李美貞·23)씨는 “회사가 외국계 기업에 인수된다는 말을 듣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며 “영어 로봇에 입력된 영어 문장을 이용해 로봇과 대화를 하면서 발음을 교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영화 게임 운동 등 취미를 이용한 다양한 영어 학습방법도 등장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E스포츠센터는 지난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외국인이 영어로 진행하는 축구와 하키 교실을 열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직장인들도 승진 등에 영어 실력이 반영되면서 새벽에 영어학원에 다니는 등 ‘생존’을 위한 영어 공부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이익훈어학원 이익훈(李益薰) 원장은 “직장에서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며 “영어를 제대로 배우려는 직장인 200여명이 진학과 무관하게 동시통역대학원 준비반에 등록해 놀랐다”고 말했다.

취업을 위해 해외에 어학연수를 다녀오거나 학원에서 토익, 토플 등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의 사교육비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이 대학 4학년생 2348명을 대상으로 취업 과외비를 조사한 결과 4년간 사교육비로 1인당 평균 1261만원을 지출했고 이 가운데 토플 토익 등 영어 학습에 지출한 비용이 1194만원이나 됐다.

박용기자 parky@donga.com

▼국내 영어교육시장 4조~5조원▼

국내 영어 시장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업계에서는 영어학원과 학습교재, 해외 연수 등을 합치면 한해 4조∼5조원 규모가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공식 집계한 영어학원만도 전국에 3000여개. 이 중 업계에서 ‘5대 메이저’라고 부르는 대형 학원들의 한해 매출액만도 1000억원이 넘는다.

그러나 학원 관계자들은 전국의 영어학원이 실제로는 최소한 1만 개가 넘고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만도 한해 2조원 가량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점에서 판매되는 각종 영어 관련 서적도 3000억원대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또 유아부터 초중고생,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영어 학습지 시장의 규모도 7000억원에 이른다. 최근 조기 영어교육이 유행하면서 유아들이 가지고 놀면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장난감, 스티커, 비디오 등 교구재 시장도 3000억원대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장단기 해외연수를 떠나는 학생과 일반인들의 연수 비용과 이들이 외국에서 사용하는 생활비 등을 합치면 최소한 1조5000억원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홍성철기자 sungchul@donga.com

▼영어열풍 이렇게 본다▼

[찬성]영어는 이미 국제어 공용화정책통해 효율적 교육 시급

여러 해 동안 영어 사용에 관한 뜨거운 논쟁들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논의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똑같은 논점이나 주장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 사이에 세상은 빠르게 변해 이제 그런 해묵은 논점들은 스스로 풀려버렸다.

대표적인 것이 모든 사람이 영어를 잘 사용할 수 있게 배워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태아에게 영어 노래를 들려주는 젊은 엄마에서부터 영어 회화 테이프에 귀를 기울이는 회사원에 이르기까지 영어를 배우는 데 쏟는 엄청난 투자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영어 공용화다. 영어가 늘 사용되는 환경에 살지 않는 한 영어를 배우는 데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도 효과는 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어 공용화가 거론되는 것이다.

영어를 공용화하면 기회의 평등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공용어로서의 영어에반대한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특정 집단이 독점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라틴어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의 엘리트들이 지식을 독점했던 것과 같다.

지식과 정보는 곧 권력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되든 우리 사회의 부유층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고, 영어에 능숙한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사람들 위에 군림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너무 거세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에 민간 부문에서는 영어에 우호적인 환경을 꾸미는 일이 착실하게 진행돼 왔다.

초등학교의 영어 전용 구역 설치, 대학의 영어 강의, 다국적 기업들의 영어 전용과 같은 조치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제 영어를 공용어로 삼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영어 공용화 조치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어떤 국제기구나 민족 국가도 영어를 국제어로 선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영어를 공통 언어로 삼았고 영어의 지위가 확고해지면서 영어가 국제어가 된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복거일 소설가

[반대]조기교육등 맹신 사교육비 낭비 심각

우리 사회에서 공교육을 통해 영어 능력을 갖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도 국민 모두가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조기 영어교육에 대한 맹신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영어 공부에 막대한 사교육비를 쓰는 바람에 유치원이나 초등학생들의 심리적 부담은 위험 수준에 달했다.

과연 모든 국민이 영어 때문에 이처럼 고통받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외국인을 상대하고 무역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영어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다. 그러면서도 정작 영어가 필요한 분야에서는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영어 교사들의 영어 구사 능력에는 신경쓰지 않으면서 모든 종류의 선발시험에 영어가 포함되는 불합리한 관행이 계속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영어가 필요한 분야는 열심히 배워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영어로 인한 부담을 과감히 덜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영어에 대한 사회적 특혜를 줄여야 한다. 영어가 필요없는 부문에서조차 영어를 강요하고 영어만 잘하면 능력자로 대우받는 풍토가 계속되는 한 영어로 인한 사회적 낭비는 완화되기 어렵다. 조기 영어교육이 번지는 것도 영어만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특전이 있기 때문이다. 영어는 그저 하나의 외국어일 뿐이다.

학교의 영어교육도 대수술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영어를 습득할 수 있고 수업시간에 영어를 실제로 사용해 볼 수 있게 수업 방식을 뜯어 고쳐야 한다. 영어로 수업이 가능한 교사만 교단에 설 수 있게 영어교사 양성 방법 등을 획기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영어교육은 무용론 시비에 휘말릴 것이다.

영어 인력 수급은 전적으로 민간 부문에 맡겨져 있다고 할 만큼 국가의 역할이 미미하다. 영어 전문 인력을 얼마나 양성해야 할 것인지 국가적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춘 인력을 양성하지도 못하면서 전 국민을 영어의 노예로 만드는 사회적 낭비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한학성 경희대 교수·영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