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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칼럼]스타 시스템

입력 | 2001-08-20 11:07:00


‘스타 시스템’이란 용어는 19세기 후반, 미국과 영국 등지의 영화, 연극 무대의 제작, 홍보 방식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감독, 주연 뿐 아니라 편집, 음악, 제작, 각본 등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을 ‘개인기’로 책임졌던 찰리 채플린에 의해 할리우드라는 영화 산업의 메카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성공담은 조직적인 스타 시스템의 구축을 통해 미국 뿐 아니라 세계를 석권한 미국 대중문화 전략의 첫번째 케이스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통용되는 ‘스타 시스템’의 개념은, 거액의 자본을 투자하는 제작자 입장에서 인기 있는 배우를 중심으로 기획, 제작함으로써 흥행성공의 가능성을 높이고 위험부담을 줄이는 상업적인 영화시스템 정도의 의미를 뜻한다.

이러한 스타시스템에 대한 부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주연배우의 기존의 캐릭터와 재능을 가장 잘 살리는 방향으로 제작되다 보니 작품의 내용이 고정화되고 기획중심주의로 흐르기 쉽다. 탑 클래스 배우의 출연료는 인플레 현상을 빚기 마련이다. 변덕스럽고 싫증내길 즐겨하는 대중의 취향은 ‘뉴 페이스’를 갈망한다. 새롭게 발굴해 낸 무명의 신인들은 ‘선전’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대중의 총아로 키워진다. 스스로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이성적이고 감성 소구적인 대중의 취향에, 이러한 시스템은 상상 이상으로 주효한 것이다. 비단 예술, 문화계뿐만 아니라 정계와 학계, 재계에서도 이러한 시스템의 기본적 메커니즘은 상당히 유효하다.

‘가장 프로야구가 재미있었던 시기’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개인차 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이 모호하게 혼재되어 있고, 수준도 그다지 높진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시즌과 새로운 흥미를 주었던 프로 초창기를 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설의 ‘해태왕조’의 팬이라면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의 야구를 가장 기억에 담고 있을 것이다. ‘화력전’이 야구의 꽃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98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요즘의 야구를 손꼽을 것이다.

위와 같은 질문에 가장 많은 호응을 받는 시기의 야구는 90년대 중반(대략 93시즌-97시즌)의 야구가 꼽힌다. 경기당 평균 관중수 5,995명을 기록한 82년 이후 점증했던 관중 동원은 93년에 8,804명의 경기당 관중 수를 기록한다. ‘가장 재미있었던 시즌’으로 꼽히곤 하는 95시즌은 최초로 경기당 관중 수가 만 명을 돌파했던 해로 기록된다(10,727명). 이러한 흥행실적은 경기당 5,236명을 기록한 98년부터 다시 급감하기 시작했다. 출범 당시에 비해, 인구수나 경제규모가 월등히 성장한 2000년의 한국프로야구의 경기당 평균 관중은 역대 최소인 4,713명에 불과했다.

90년대 중반의 한국프로야구의 흥행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요인은? 기본적으론 각 구단간의 공방이 재미있게 전개되었던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의 명문구단이자 일정한 관중동원력을 가진 타이거스가 과거의 전성기와 같은 ‘절대강자’의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여전히 정상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신흥명문으로 부상한 트윈스가 수도권 청춘남녀들의 절대적인 성원에 힘입어 최고의 인기구단으로 부상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들이 역시 관중동원능력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고 상대적으로 이 기간동안 선전했던 베어스, 자이언츠와 벌인 격돌은 레이스의 흥미를 배가시켰고, 흥행성공으로 이어졌다. 95시즌의 ‘대박’은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베어스와 트윈스의 치열한 ‘야구 대전쟁’이 큰 몫을 차지했다.

분석단위를 무대에서 ‘열연’을 선보이며 관객들을 흡인했던 스타 플레이어들 쪽으로 돌려보자. 90년대 초반을 장식했고 지금까지도 꾸준한 활약을 보인 장종훈, 김기태와 같은 선수들. 그들에 이어 90년대 중반을 장식한 양준혁, 이종범과 같은 걸출한 야수들이 나타났다. 트윈스를 최고의 인기구단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한 ‘3인방’이 출현해서 전성기를 보낸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90년대 후반의 한국야구를 이끈 박재홍, 이승엽과 같은 新星들이 무대의 전면에 나선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마운드는 어떠한가? 80년대를 지나 90년대의 중반이 되도록 그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던 선동열이란 巨木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조계현, 이강철, 김용수 등 노장 투수들의 투구는 완숙미를 더해갔다. 포스트 선동열 시대의 트로이카 였던 이상훈, 김상진, 정민철의 라이벌 전은 당시의 빼놓을 수 없는 흥행카드였다. 이대진, 박충식, 구대성, 김상엽 등 영건들의 출현은 마운드의 높이를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튼튼히 높여놓았다. 대부분의 이들이 이 기간을 마운드의 높이가 배팅 박스를 압도했던 때로 기억한다. 80년대 초중반 무렵, 평균 방어율이 3점대 초중반에 머물다 점차 배팅파워가 증가하여 92시즌에는 평균 방어율 4.32를 기록하고, 팬들로 하여금 장종훈의 41홈런이란 신화의 탄생을 목도하게 만든다. 93시즌 들어 평균방어율은 급격히 떨어진 3.27을 기록한다. 이러한 급격한 ‘안정세’가 이 기간을 ‘투고타저’의 양상이 심화되었던 때로 기억하게 한다. 그러나 93시즌을 제외하면 3점대 중후반의 방어율을 유지했던 이 기간은 투타의 조화가 완벽에 가까운 밸런스를 유지했던 기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또한 어느 때보다 수준 높은 투수들과 야수들의 공방이 이루어졌고, 매력적인 선수들의 플레이가 관중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후의 프로야구가 침체를 면치 못했던 원인 또한 다양하게 분석된다. ‘생존’이라는 화두에 직면했던 90년대 말 한국의 시민사회에 야구장은 이전만큼의 소구력을 가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모기업들 중 일부가 휘청대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의 한국야구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종범과 이상훈이 97시즌을 마치고 떠나갔다. 투타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선동열과 이상훈이란 스타가 고국을 떠난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9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던 노장투수들이 무대의 중심에서 내려왔고, 한창 뻗어나갈 나이의 영건들도 부상에 시달리며 早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때맞춰 ‘박.찬.호’ 라는 초대형 블록버스터가 출현한다. 무너져가는 밸런스를 맞춰줘야 할 젊은 야구천재들은 고국의 무대대신 미국 메이저리그 산하의 팜으로 달려갔다. 1998년의 경기당 평균관중 5,236명의 기록은 삼성의 전후기 석권으로 인한 시리즈 무산으로 흥미가 반감되었던 85년의 5,116명의 기록에 이은 최저 동원 기록이다.

‘프로’ 스포츠는 그 자체로 ‘마케팅’이다. 98년의 처절한 몰락 이후 ‘업계 종사자’들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종범 이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승엽의 ‘몬스터 시즌’이 기형적인 타고투저인 99시즌에 폭발한다. 이종범이 떠나고, 박재홍이 주춤한 사이에 이병규가 새롭게 ‘야구천재’로 자리잡는다. 이들은 소속구단과 스포츠 언론에 의해 ‘세기말의 야구영웅’으로 포장된다. 트윈스는 99시즌 최악의 성적부진(당시의 기준으로)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11,001명을 동원하며 흥행실적 2위를 기록한다. 90년대 중반의 침체기 이후 다시 정상권에 진입하고 이승엽이란 몬스터를 보유한 라이온즈 구단의 관중동원은 서울, 부산을 제외한 연고지의 동원관중으론 파격적인 8,354명을 기록한다(99시즌 정규리그 1위였던 베어스의 경기당 관중동원은 7,537명에 그쳤다). 풍족한 연고지에 자리잡은 데다 호성적을 낸 롯데가 11,671명의 최다관중을 동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99시즌의 반짝 장세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2000시즌은 경기당 4,713명의 관객동원이라는 참담한 흥행참패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내셔널리즘까지 겸비된 성원을 업었던 이승엽은 선수협이란 암초에 걸려 ‘시민타자’로 전락했다. 나란히 99시즌에 절정기를 맞이했던 선수들의 플레이 또한 ‘조정국면’에 들어갔다. KBO가 흥행의 성공을 위해 도입했던 용병제도가 야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끼친 영향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흥행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 듯 하다.

2001시즌의 중반을 넘어선 여름, 프로야구는 뜻밖의 호재를 만난다. 90년대 중반, 아니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대표야수’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무등골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바람’을 몰고 다녔던 그가 ‘열도 정벌’에 성공하고 금의환향 하지 못한 점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그의 복귀는 가장 좋은 모양새를 갖춘 채로 이루어졌다. 타이거즈가 새로운 물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을 그는, 연고지의 팬들로부터 ‘왕조의 부활’이라는 바램을, ‘업계종사자’들에게는 한국프로야구의 부흥이라는 바램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국야구의 흥행부진의 원인에 한 사람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냐고 물을 지도 모른다. 97시즌, ‘해태 왕조’의 마지막 우승을 이종범이 견인했던 해에 타이거즈는 6,240명의 경기당 관중을 동원한다. 98시즌의 해태는 ‘정상적인’ 구단 운영을 했다. 4강 문턱에서 좌절하긴 했지만 승률 5할에 육박하는 성적을 올렸다. 그 해 해태는 경기당 2,489명의 관중동원을 기록한다. ‘망가지기’ 시작한 99년에는 2,617명을, 2000년에는 1,049명의 경기당 관중동원을 기록한다. 너무도 참혹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99년 경기당 관중동원 기록인 757명에 필적할 만한 기록이기도 하다.

‘카리스마’란 단어는 원래 기독교의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가 베푸는 ‘은총의 선물’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막스 베버에 의해 이 어휘는 보통의 인간이 가진 것과는 다른 초자연적·초인간적 재능이나 힘을 의미하는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야수로서의 이종범은 80년대의 영웅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쉽게 따르지 못할 ‘카.리.스.마’ 그 자체였던 선수이다. 그런 그가 돌아온 이후, 스포츠 언론들의 행보는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일이기도 하다. “그가 없는 사이에 너무도 많은 ‘가짜’ 야구 천재들이 ‘행세’해왔고, 이제 이종범은 그들과의 맞대결을 통해 ‘眞僞’를 가릴 때가 왔다”는 류의 기사까지 볼 수 있는 형편이다. 물론 ‘포스트 이종범’ 시대의 야수들이 ‘스타시스템’의 구동을 통해 어느 정도 과대평가 되어왔던 점도 없지 않다. ‘프로야구’라는 시장이 급속하게 위축된 것은, ‘볼거리가 없다’, ‘재미가 없다’라고 인식된 데에서 일차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창 절정을 구가하던 시기를 해외에서 입은 불의의 부상으로 아깝게 날려보내고 다시 고국을 찾은 31살의 내야수가 과연 예전과 같은 바람의 진원지가 될 수 있을 지는 쉽게 낙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종범-이xx, 야구 대전쟁’, ‘이종범-이xx, 영웅전쟁’, ‘이종범-박xx, 천재격돌’ 류의 도식적이고 진부하면서도 친숙한 카피를 편집기자들이 찍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 자체가 ‘아직은’ 소멸되지 않은 그의 카리스마이기도 하다.

‘왕년의 名優’가 선보일 ‘녹슬지 않은 개인기’를 바라는 연고지의 팬들, ‘업계종사자’들이 거는 기대는 현재진행의 것이고 미래지향적인 것이기도 하다. 또한 한편으로 그의 존재는 한국 프로야구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회고적인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그가 지난 날, 그라운드를 누빌 때 경쟁했던 이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무대의 전면에 섰던 이들의 멋진 플레이를 기대하는 마음은 필자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다. 또한 언젠가 이들의 뒤를 이어 우리를 매료시킬 ‘뉴 페이스’들의 출현과 그들이 펼치는 ‘잔디위의 향연’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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