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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Digital]집행유예, 재범방지 취지 못살린다

입력 | 2000-05-31 20:17:00


구치소에 수감돼 재판중인 범죄자들이 ‘무죄’ 다음으로 바라는 말이 있다. 바로 ‘집행유예’다. 집행유예(집유)란 판사가 범죄자에게 징역이나 금고를 선고하면서 정상을 참작해 1∼5년의 기간 집행을 유예하는 제도.

이 기간 중 다시 죄를 짓지 않으면 형 자체가 실효(失效)돼 없던 일이 되지만 집유 기간 중 또다시 죄를 지어 유죄가 ‘확정’되면 다시 집유를 받을 수 없고 집유를 전제로 받았던 이전의 징역형도 합해 복역해야 한다.

징역이나 금고형을 살고 나와 5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이 다시 죄를 지어 유죄가 ‘확정’된 경우도 집유가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를 법조계는 ‘곱징역’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곱징역’의 조건. 집유는 ‘근신하며 죄를 짓지 말라’는 조건으로 베푸는 선처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는 집유기간 중 죄를 지은 사람은 곱징역을 살아야 하지만 형법은 이 경우를 죄를 짓고 유죄가 ‘확정’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무죄 추정의 원칙 때문이다.

따라서 집유 기간 중에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집유 기간이 끝난 뒤 확정판결을 받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시간 벌기’를 노린 천태만상이 벌어진다.

▼실태

97년 1월 폭력 혐의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김모씨(24)는 같은 해 8월 사소한 혐의로 입건될 처지에 놓이자 달아났다. 김씨는 집유기간이 끝난 99년 2월 경찰에 자수했다. 1년6월형이 살아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

96년 3월 징역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된 조직폭력배 이모씨(45)는 98년 2월 사기혐의로 구속되자 검찰이 밝혀내지도 않은 또 다른 혐의를 자백해 별건으로 구속됐다. 두 혐의를 합해서 재판 받게 되면 1심 구속재판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씨는 집유기간 만료 한달 뒤 두 혐의에 대해 징역 2년을 확정 받았다. 앞선 2년6월형을 살지 않게 됐으므로 ‘작전’은 성공한 셈이다.

서울지법 김대휘(金大彙)부장판사는 “집행유예 기간중인 대부분의 불구속 피고인들은 범죄를 철저히 부인하고 많은 증인을 신청하는 등 시간을 끌고 반드시 항소 또는 상고한다”고 말했다. 집유제도는 이처럼 재판지연과 항소 남발로 인한 재판사건 폭주의 원인이 된다.

피고인들은 또 판사에게 말을 잘 해 재판을 끌어줄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구치소에서는 해당 판사와 친한 판사 출신 변호사가 누구인지에 대한 ‘족보’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이른바 ‘전관예우’신화의 시작이다.

▼개선 방안

서울대 이재상(李在祥)교수는 “집유제도는 재범방지가 주된 목적이므로 형이 확정된 경우에 한해 집유가 실효(失效)되게 한 형법조항은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은 재범의 시점을 곱징역의 기준으로 하고 있다.

검찰은 현행 형법이 재판시한을 결정하는 법원에 지나친 권한을 주고 있으며 판사출신 변호사들의 부당한 ‘수임’근거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지검 검사는 “독일처럼 행위시점을 기준으로 해 강도나 조폭, 마약혐의자 등 중죄인, 동종범죄 재범자는 재범 즉시 집유를 실효시키고 반대로 교통사고 등 비난가능성이 적은 과실범 등은 예외적으로 형 확정시점을 기준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도 “징역 6월형이 적당한 피고인이 과거의 형까지 3년6월을 복역하게 되는 경우 등은 지나치게 가혹해 벌금형을 선고하거나 기간을 연장해주는 경우가 많다”며 “합리적으로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