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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달은 도둑놈이다'/인생-문학의 위기맞은 '나'

입력 | 2000-03-03 19:17:00


▼'달은 도둑놈이다' 박일문지음/민음사펴냄▼

박일문(41)의 새 장편 ‘달은 도둑놈이다’는 ‘지식인 소설’이다. 주인공 ‘나’는 끊임없이 숙고하고 사색하며 삶과 사회와 예술에 대해 발언을 쏟아놓는다.

그러나 주인공의 사색은 주변 세계에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안락을 회피하는 성향은 그에게서 가정과 아내를 박탈한다. 삼 년 동안의 별거 끝에 아내는 곧 미국으로 이주하려 한다. 그의 사색을 쏟아부은 첫 창작집은 고작 오십 부가 팔려나갔을 뿐이다. 사회로부터도 그는 고립되어가는 것이다.

겹겹의 한계에 둘러싸인 ‘나’는 쫓기듯 제주에 내려앉는다. 그에게는 곧 마무리지어야 할 소설 ‘나는 죽었다’의 원고가 있고, 공항에는 PC통신을 통해 알게 된 여인 한란이 마중나와 있다. 한란은 몸을 파는 여인이면서 제법 완성도 높은 시를 쓰는 문학지망생이기도 하다.

‘나’의 예감처럼 제주 여행은 주인공이 독백 및 한란과의 대화, 삼류 예술가 장감독과의 조우 등을 통해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확인해 나가는 여정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고립보다 더 크게 그의 내면을 괴롭히는 것은, 그가 길지 않은 생애를 바쳐온 문학 자체의 위기다.

‘우리는 비만의 도서관과 정보의 홍수와 지식의 과잉 때문에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어디서 인용했는지 출처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게 아닌가… 나 같은 작가 한 사람이 죽어도 작가의 삶은 지속될 것이며 잡다한 공장에서 텍스트가 제작될 것이다.’

돌파구를 찾지 못한 ‘나’는 성산포 앞바다에 잠겨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은 글을 써보아야 ‘고전을 편집한 시뮬레이션’을 뛰어넘을 수 없는 현대 문학의 벼랑 끝 상황을 상정하는 것일까.

‘달은 도둑놈이다. 달의 창백한 빛은 태양에서 훔쳐왔으니까.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도둑놈들이다. 그들의 작품은 달과 태양, 빛과 어둠, 공기와 바람에서 훔쳐왔으니까. 나의 자살 또한 이미 자살한 예술가들의 표절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문학의 본질에 대한 공격을 통해 문학의 갱신을 의도해 온, 작가들의 ‘불온한’ 전통 또한 그는 ‘표절’하고 있는 것이리라.

문학을 불구덩이에 던져넣음으로써 잿속에서 정련된 금을 발견해온 옛 ‘도둑놈’들의 전략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용광로에서 금이 나타날 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민음사 펴냄.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