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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세상읽기]병역비리부터 없애자

입력 | 2000-01-11 21:59:00


군필자가산점 위헌결정을 옹호하고 남성 네티즌들의 ‘언어폭력’을 나무란 칼럼(본보 99년 12월 27일자)을 쓰고 난 다음 128개의 전자메일을 받았다. 동조하는 메일은 다섯 개뿐, 나머지는 모두 비판과 욕설이었다. 물론 욕먹을 각오를 하긴 했지만 인터넷 동아일보 BBS(토론광장)를 비롯하여 수없이 많은 인터넷 통신 사이트를 채웠던 비난의 목소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험악했다.

헌법재판소와 여성단체, 그 칼럼을 실은 동아일보와 나 개인을 비판 또는 비난한 논리 가운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군필자 가산점 옹호 일리있어▼

첫째, 남자들이 군에서 ‘썩는’ 동안 여자들은 그만큼 공부하는 시간을 가진다. 군필자가산점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병역 의무 수행으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아니된다’고 한 헌법의 정신에 위배되는 또다른 성차별이다. 평등은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지 무조건 만인에게 똑같이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둘째, 우리 헌법은 국방의 의무를 ‘국민의 4대의무’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병역법은 남자에게만 병역의무를 떠안기고 여자들은 원할 때만 군 복무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남녀평등에 위배된다. 여자도 원하면 군복무를 해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군필자가산점 제도는 위헌이라 할 수 없다. 여성들이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찾아 먹으려는 건 얌체같은 짓이다. 이 논리는 여자도 모두 군대가도록 병역법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나는 군복무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건강한 남자’들이 여성에 비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한국 여성들은 가정생활뿐만 아니라 취업과 승진 등 사회생활 전반에서 일상적인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헌재의 결정을 또 다른 성차별이라고 비난하고 여자도 군대가라고 외치는 것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다. 군필자가산점 제도는 또한 장애인에 대한 명백한 차별임을 다시 지적해야 하겠다. 일부 네티즌들은 장애인 채용 할당제를 확대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편에서 장애인에게 엄청난 불이익을 주는 제도적 차별을 실시하면서 다른 한편에서 쿼터제로 혜택을 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장애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균등한 기회를 주고 그 위에 ‘특별한 보호’를 위한 추가적인 혜택을 주는 것이 옳다.

어떤 네티즌들은 이번 결정을 내린 7명의 헌법재판관 가운데 두 사람이 현역 군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어 격렬하게 헌재를 비난했다. 하지만 다른 5명의 재판관들도 모두 위헌결정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비난은 근거가 없다. 물론 헌재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닌 만큼 누구나 그 결정을 비판할 자유와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수많은 남성 네티즌들이 쏟아낸 분노에 찬 욕설과 비난은 비판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자들 가운데 가산점의 혜택을 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공무원시험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군필 남자’들까지 대거 비난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총선을 앞둔 정부여당으로 하여금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무시하고 가산점 제도를 존속시키는 법률 개정안을 논의하게 만들었다. 이 격렬한 분노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유전면제 무전현역’을 부르는 병역비리가 그 원천이다.

▼'有錢면제'가 논란의 원천▼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몽땅 빼앗긴 채 병영에서 ‘귀중한 청춘을 허송’하는 동안 부자와 권력자를 아버지로 둔 다른 ‘건강한 남자’들이 호의호식하며 훨씬 앞서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보고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정당한 분노’를 해소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북 사이에 신뢰와 평화가 자리잡지 못한 현재로서 이건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다. 남은 방법은 징병제를 유지하되 병역비리를 철저히 뿌리뽑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특히 권력을 쥔 남자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자기 권리를 찾으려는 여자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없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