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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강창일/「이재수의 난」속의 진실

입력 | 1999-06-10 19:27:00


‘이재수의 난’은 픽션이 아니다. 1901년 변방 제주도에서 도민과 천주교도간에 싸움이 벌어져 무려 300여명의 희생자를 낸 사건을 가리킨다. 조선후기 수많은 민란과 달리 천주교라는 종교세력과 도민들 사이의 갈등이 원인이 됐고 프랑스와 일본의 군함이 파견되는 국제적 사건이기도 했다.

구한말 천주교는 제국주의 프랑스의 힘을 등에 업고 치외법권을 향유하는 특권세력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종래 봉권적 권력으로부터 억압받고 수탈당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중 그 특권을 누릴 목적으로 입교하는 자가 생겼다.

당시 제주에는 두 명의 프랑스 신부와 900여명의 신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중 일부는 특히 중앙에서 파견된 세금 징수관(봉쇄관·封稅官)과 결탁해 경제적 이권을 챙기는가 하면 개종을 강요하기도 했다.

도민(당시 11만여명)들은 이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고 천주교측에서도 ‘성전(聖戰)’으로 맞섰다. 이재수측은 결국 제주성을 함락시켜 많은 천주교인을 살상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프랑스 군대와 중앙의 정부군이 파견되어 이재수 등 주모자는 체포되어 서울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후 제주도민은 이들을 ‘의사’로 여겨 추모비를 세워 기념하는 반면 천주교측은 구한말 최대의 박해사건(敎難)으로 규정하고 있다. 같은 사건에 대해 상반된 해석과 인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와 예술은 분명 다른 영역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는 곤란하다. 영화 속에서 중립적 지식인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된 채군수(명계남)의 행적은 상당히 다르다. 그는 초기 상무사라는 조직을 결성해 천주교의 횡포에 맞선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이후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던 기회주의적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이재수는 어떤 면에서 카메라가 집중될 만큼 민란의 중심적 인물이 아니다.

행동대장격이었던 그는 천주교도에 대한 잔인한 살인으로 부상한 것일 뿐이다.

이재수의 연인인 숙화(심은하)는 어떤 자료에서도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재수가 최초로 신식재판을 받고 처형됐다는 마지막 엔딩 자막도 사실이 아니다. 이미 1895년부터 신식재판이 이루어졌다.

이같은 잘못된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작품이 역사적인 해석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결국 관객들은 이 작품을 보면 역사적 사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혼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강창일(배재대교수·한국사)

▼참고문헌 ▼

△‘제주도신축년교난사’(김옥희, 천주교제주교구, 1980)

△‘1901년의 제주도민 항쟁에 대하여―한말 천주교의 성격과 관련하여’ (강창일, 제주도사연구 창간호, 1984)

△‘1901년 제주민란의 재검토’(김양식, 제주도연구 6집, 1989)

△‘한말 제주지역의 천주교회와 제주교안’(박찬식, 한국근현대사연구 4집, 1996)

△‘한말 천주교회의 제주교안 인식’(박찬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집,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