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작]비어 있는 방<2>

입력 | 1997-12-31 18:33:00


지, 금, 누, 가, 누, 구, 한, 테, 큰, 소, 리, 치, 는, 거, 야? 진씨는 아주 가끔씩 공원 쪽을 쳐다본다. 진씨가 올려다보는 공원 언덕에는 S모텔이 자리잡고 있다. 누구든 모텔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씨의 포장마차 앞을 지나가야 한다. 거리는 아주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끼니도 거르고 잠도 자지 않았다. 아파트 출입문은 이중으로 잠그고, 안전 걸쇠도 단단히 걸어 두었다. 나는 밖으로 나간다거나 창문을 열거나 불을 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거, 내, 려, 놓, 지, 못, 해? 남자가 떠난 벤치 주위는 적막감마저 감돈다. 가끔씩 라이트를 켠 승용차가 모텔쪽으로 올라갈 뿐이다. 모텔을 향해 속도를 내던 승용차들은 모두 D아파트 입구에 설치된 속도방지턱 앞에서 급정거한다. 차들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모텔을 향해 한 차례씩 절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리가 다시 조용해진다. 거리가 조용한 것처럼 진씨의 포장마차에도 손님이 없다. 진씨는 이따금씩 모텔쪽으로 눈을 던지지만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돌아선다. 그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뜬다. 시계는 벌써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빠, 나 혜원이야. 전화 좀 받아 봐. 아직 안 일어났어? 엄마가 아빠한테 전화하면 혼내준다고 그랬어. 그래도 난 아빠가 좋아. 아빠도 나 보고 싶었지? 모레가 내 생일인데 꼭 와야 돼. 안녕!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응시한다. 그런 상태로 한참 동안 누워 있다가 천천히 일어선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간다. 창밖으로 먹구름이 낀 하늘과 날아 떨어지는 빗줄기가 보인다. 그는 창문을 열고 거리를 내려다본다. 남자가 우산을 받쳐든 채 몰아치는 비바람과 싸우고 있다. 남자의 우산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다. 남자 앞으로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자가 지나간다. 분홍색 우산 밑으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날린다. 비바람에 날리는 여자의 머리카락은 우산 가장자리를 따라 부챗살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 모텔쪽으로 올라간다. 그는 창문을 닫고 거실로 나간다. 거실은 아직도 광고지로 어지럽다. 그는 광고지를 밟으며 현관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통기구 밑에 떨어져 있는 우유와 신문을 집어들고 돌아선다. 그는 거실쪽으로 가려다 말고 주춤 멈춰 선다. 그의 발걸음을 붙잡는 건 몇 달씩 밀린 청구서들이다. 그는 허리를 굽혀 청구서 뭉치를 집어든다.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그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린다. 다시 초인종 소리가 길게 공기를 찢는다. 그는 잠시 숨을 멈추고 밖의 동정을 살핀다. 초인종 소리는 코앞에서 울리고 있다. 그는 천천히 보안경으로 눈을 가져간다. 벨을 누르고 있는 사람은 신문대 수금원이다. 우락부락한 체격의 남자는 얼굴에 핏대까지 올리며서있다. 그는 보안경에 눈을 박은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수금사원은 한참 동안 벨을 눌러대다가 돌아간다. 그는 머그잔에 우유를 따른다. 그리고 빵조각을 들고 창가로 다가간다. 남자의 우산은 거의 다 찢어져가고 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남자는 비바람에 온몸이 노출될 것 같다. 그는 아주 천천히 빵을 씹으며 우유를 들이켠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깨뜨린다. 한 과장님, 저 오 마담이에요. 과장님 보고 싶어서 미치겠다. 요즘 왜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한번 놀러 오세요. 쌈빡한 애들 몇 명 새로 데려왔어요. 과장님이 보시면 아마 홀딱 반할 걸. 그런데… 과장님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 이 전화 받는 대로 곧장 달려오세요. 안녕, 마이 달링. 그는 전화기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바라본다. 세차게 쏟아지던 비는 한결 누그러져 있다. 하지만 바람은 아직도 남자의 우산을 흔들고 있다. 죽, 일, 테, 면, 죽, 여! 옆집에서는 난투극이 벌어진 듯하다. 그는 소파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신문을 집어든다. ―사십대 정신 질환― 그는 신문 기사를 들여다본다. ―실직 바람이 불면서 사십대 남자에게도 정신 질환이 나타나고 있다. 이 질환은 직장과 가정에서의 지위 상실과 함께 무력감에 빠져 자살을 생각하는― 그는 전화벨 소리로 인해 신문에서 눈을 뗀다. 과장님, 저 광고기획부 미스 윤이에요. 이렇게 늦게 알려드려서 죄송해요. 그 동안 저도…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요. 과장님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건 정이사 짓이에요. 회사 공금도 정이사가 가로채서는 과장님한테 덮어씌운 거예요. 이런 건 미리 알려드려야 했는데…. 저는… 과장님이 사표까지 내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더군다나 사모님하고 이혼까지….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서재쪽으로 걸어간다. 자동응답기에서는 계속해서 미스 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만, 그는 서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이, 년, 이, 사, 람, 잡, 겠, 네? 너, 죽, 고, 나, 죽, 자, 이, 놈, 아! 옆집 부부는 이제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싸우고 있다. 서재 안에서는 언제나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난다. 그는 곰팡이 냄새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방 가운데로 들어선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서재 한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거기에 컴퓨터가 놓여 있고, 모니터에서는 군인이 피를 흘리며 서 있다. 아군의 부상 정도는 60%, 실탄 5발 휴대, 병기 기관총, 적의 수 30명. 그는 마우스를 움직인다. 적의 보급창고로 가서 의료상자와 탄약상자를 찾아야 한다. 여기에 있으면 죽음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어둠과 죽음의 공포에 익숙해졌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란 그다지 무섭지도 않고, 또 슬프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는 죽음…, 하고 중얼거리며 책에서 눈을 뗀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간간이 햇살이 비친다. 남자는 벤치에 비스듬히 앉아 온몸으로 햇살을 받고 있다. 옆집 부부의 싸움도 소강 상태에 들어간 듯 가벼운 발걸음 소리만 들린다. 남자 뒤쪽 공터에 수고양이가 나타난다. 수고양이는 아파트 지하 창고에서 살고 있는 놈이다. 놈이 보금자리로 정한 B동의 지하 창고는 언제나 어둡고 음습하다. 놈이 언제부터 그곳에서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하다. 고양이는 아파트 A동과 B동 사이의 풀밭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비가 그친 공터는 물기를 머금은 풀들로 싱그럽다. 고양이는 유난히 물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앞쪽으로 몇 걸음 가지 않아 발을 흔들며 물기를 털어낸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가 쿨럭거리며 기침을 한다. 고양이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남자를 바라본다. 그 때 A동 모퉁이에서 몰골이 사나운 개가 튀어나온다. 고양이는 개를 발견하고 재빨리 B동 지하 창고 안으로 숨는다. 개는 고양이가 들어간 창고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남자가 앉아 있는 벤치쪽으로 다가간다. 개는 남자의 발끝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남자가 개를 정겨운 눈으로 내려다본다. 개도 남자를 올려다본다. 개의 털은 흙먼지에 뒤엉켜 있어 차라리 잿빛으로 보인다. 그는 창가에서 돌아선다. 그리고 주방쪽으로 걸어간다. 그는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코드를 꽂는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돌아간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자동 응답기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은 외출 중입니다. 메모 남겨 주세요.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쪽으로 걸어간다. 한과장, 나 이 사무장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그러니까… 아파트하고 시골 땅도 전부 경매 처분하는 걸로 결정이 났어. 여기저기 손은 써 봤는데…. 젠장, 쓰러진 놈 밟고 지나가는 세상이야. 또 전화할게. 자세한 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구. 그는 느린 동작으로 커피를 넣고, 프림을 타고, 티스푼으로 젓는다. 먹물처럼 까맣던 물빛은 이내 뽀얗게 변한다. 그는 커피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간다. 남자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개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흔든다. 남자는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낸다. 개의 시선이 남자의 손끝을 주시한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을 개에게 던져준다. 개는 남자가 던져준 물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이내 입에 물고 어디론가 뛰어간다. 남자는 그런 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잔잔해졌던 바람이 다시 일기 시작한다. 아참, 깜빡했네. 경매일도 확정됐어. 이 달 말이야. 하루가 급한데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이거 일이 꼬여도 한참 꼬이는구먼…. 이 사무장은 다시 전화를 걸어 허겁지겁 말하고 끊는다.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서재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꺼낸다. 책이 뽑혀져 나올 때마다 먼지가 우수수 쏟아진다. 그의 손에 의해 뽑힌 책들은 모두 허옇게 속이 뒤집혀진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일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가 찾고 있는 물건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유독 표지가 누렇게 바랜 책을 집어든다. 그리고 천천히 책갈피를 넘긴다. ―현실과 이상 사이― 책갈피에 숨어 있던 바퀴벌레가 놀란 듯 허둥지둥 달아난다. 그는 또 다른 책 ―피안으로 가는 길― 을 골라든다. 그 속에도 그가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잠시 꺼내놓은 책을 둘러보다가 ―죽음 앞에서― 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 래, 찔, 러, 봐, 라! 남자의 격앙된 목소리가 옆집에서 들려온다. 내, 가, 못, 찌, 를, 거, 같, 아? 여자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남자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벽을 울린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책상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책상 위에 쌓여 있는 광고지를 뒤적거린다. 그 바람에 먼지와 범벅이 된 종이들이 방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내린다.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웃으며 방바닥에 나뒹군다. 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반라의 여자들을 쫓아간다. 그때 여자들 사이에 끼여 있는 검은 약봉지가 보인다. 그는 그 약봉지를 집어든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거실로 나간다. 남자는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린다. 개는 기침을 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올려다본다. 남자가 개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개는 꼬리를 흔들며 낑낑거린다. 잠시 후 남자는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내 개에게 던져준다. 개는 남자가 던져준 물건을 입에 물고 달려간다. 뛰어가는 개의 목걸이에서 햇빛이 반짝 빛난다. 남자는 기침을 하면서도 이러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나 마케팅부 강인데. 한과장, 당신 정말 이럴 수 있어? 광고업곈 신용이 목숨이야.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이거 큰일 낼 사람이구먼. 알고 있겠지만… 사흘 안으로 자금 메워놓지 않으면 나도 이젠 가만 있지 않겠어! 전화기는 격앙된 목소리를 쏟아놓고 다시 조용해진다. 남자는 이제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다. 그때 어디선가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그는 블라인드를 내린다.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