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원대 후반대 원-달러 환율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환율의 고공행진이 계속되자 외환당국은 이번 주 국민연금과 만나 환율대책을 논의한다고 한다. 자산운용 방식 등을 바꿔 국민연금이 외환시장의 ‘소방수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환율 안정은 필요하지만, 국민의 노후가 달린 연금 수익률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다.
정부가 환율 대응에 국민연금을 동원하려는 건 달러를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 수요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8월 말 기준 국민연금 기금 1322조 원 중 44%가 해외 주식·채권인데, 대부분이 달러로 사들인 자산이다. 이 비중을 줄이거나, 환율변동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환 헤지’를 강화할 경우 환율을 끌어내리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개인 투자자인 ‘서학개미’의 달러 유출을 막을 방법이 없다보니, 정부 입김이 잘 먹히는 국민연금부터 압박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방식이 국민연금의 수익률을 중장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들어 10월 말까지 국민연금이 20%대 운용 수익률을 올렸는데, 이는 국내외 주가가 동시에 폭등해 생긴 대단히 이례적 수익률이다. 과거 20년 간 연평균 수익률은 6.27% 수준이다. 올해만 60% 오른 코스피가 미국 발 인공지능(AI) 거품론이 커질 때마다 급등락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연말 주가와 수익률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시장 변동성이 큰 상황에서 14.9% 안팎인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투자비중을 더 높이거나, 별도의 원칙이 있는 ‘환 헤지’ 기준을 정부가 개입해 바꿀 경우 수익률이 하락할 수 있다. 기준금리가 미국보다 1.25∼1.5% 낮고, 서학개미의 해외투자 열기와 대미투자를 위한 기업의 달러 수요가 계속되는 한 연금을 동원한 환율 방어는 기금만 축낼 가능성이 있다. 해외 연기금들이 기금운용의 독립성을 각별히 강조하는 것도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때를 연상시키는 지금의 환율은 위협적이다. 수입물가 상승 등 부작용도 적지 않다. 하지만 경상수지 흑자가 계속되고 있고, 한국인의 해외보유 자산이 부채보다 훨씬 많은 만큼 과거 위기 때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지금은 국민연금을 동원해 환율을 끌어내릴 게 아니라, 경제체질 개선을 위한 구조개혁의 속도를 높여 대응하는 게 정석이다.
Most View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