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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가 질식해간다… 노거수 덮은 콘크리트 뜯자

‘경이’가 질식해간다… 노거수 덮은 콘크리트 뜯자

Posted November. 30, 2023 08:00,   

Updated November. 30, 2023 08:00


얼토당토않은 소리 같지만 기자에겐 갈 때마다 지구의 자전이 체감되는 듯한 장소가 있다. 강원 평창 월정사 앞 전나무숲길. 2006년 쓰러졌다는 육백 살 나무는 텅 빈 속에 곰이 들어앉아 쉴 것 같은 크기인데, 그 건너편 그루터기, 곰곰이 들여다보면 어지러워질 만큼 동심원이 많은 나이테 위에서 ‘멍 때리며’ 앉아 있으면 꼭 그런 기분이 든다.

겨울 숲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느낌은 더욱 강해진다. 희미한 해가 윤곽을 잃고, 다람쥐가 뒤척이며 떨어뜨린 눈이 살포시 지면을 두드릴 때면, 키 큰 나무의 물관이 지표 아래서부터 한껏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렇게 도착한 낯선 곳에선 마치 시간이 물리적 실체로 지각되는 것만 같다. 이런 착각은 거대하고 말 없는, 뿌리박아 움직이지 않는 초연한 존재가 선사한 경이(驚異) 덕일 것이다.

강원이 산이라면 제주는 숲이다. 얼마 전 다녀온 거문오름 곶자왈. ‘돌은 낭(나무) 의지, 낭은 돌 의지’라는 제주 속담처럼 돌을 붙잡고 깊이 뿌리 내린 거목과 그 위를 다시 콩짜개덩굴이 뒤덮은 모습을 보노라면 ‘고다마’(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숲의 정령)가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 것만 같았다.

이런 기분은 이젠 도시를 떠나서야 체험할 수 있게 됐지만 전통시대엔 노거수(老巨樹)가 일상의 일부였다. 마을 어귀마다 느티나무가 정자나무로 서 있었고, 산기슭의 당산나무는 신령하게 여겼다. 그 시절 경이와 신비는 마치 밥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물론 산업화를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지만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도 오래된 마을엔 여전히 아름드리나무가 꽤 있다. 다만 거기서 놀라움은 좀 다른 것이다. ‘이런 채로도 생존할 수 있다니!’

건물과 도로가 침식한 공간의 틈새에서 노거수는 산다. 지표가 콘크리트로 덮인 채 가로세로 1m 정도 되는 흙바닥에 떨어지는 빗물과 양분에 의지해서, 새로 길을 내느라 복토(覆土·흙을 덮음)한 흙에 덮여 뿌리에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노거수가 이런 환경에 처하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 처음으로 데이터로 밝혀졌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은 18일 ‘네이처’ 자매지인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노거수의 생육 환경과 나무의 활력에 관한 연구 결과를 게재했다. 연구팀이 느티나무 노거수 25주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수관(樹冠)이 펼쳐진 넓이보다 좁은 생육 공간에서 자라는 노거수는 최대 광합성 속도 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바닥을 덮은 콘크리트가 공기와 물, 영양분의 이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닥에 흙을 두껍게 덮어 물이 땅속으로 침투하기 어려울수록 나무의 활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낮았다.

노거수 주위의 콘크리트를 뜯자. 뿌리가 숨을 쉴 수 있게, 인위적으로 덮은 흙은 걷어내자. 연구진은 전화 통화에서 “벤치를 놔두는 정도야 괜찮겠지만 적어도 수관 폭만큼은 바닥을 자연 상태로 둬야 노거수의 생육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천연기념물 가운데는 600∼700년을 산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도 있다. 우리가 오래 살 나무를 천천히 죽이고 있는 셈이다. 말라 죽는 노거수와 함께 우리의 경이도 질식해 간다.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