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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왕궁, 고지대에 지어 위용 과시”

“금관가야 왕궁, 고지대에 지어 위용 과시”

Posted February. 14, 2022 07:47,   

Updated February. 14, 2022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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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세기 금관가야 왕궁이 서민 거주지에선 보이지 않는 해발 30m의 고지대에 지어진 사실이 지리정보시스템(GIS) 연구로 확인됐다. 지배층의 위계를 공간에 구현한 것으로, 비슷한 시기 신라왕궁인 경북 경주 월성(月城)도 서민 거주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대에 조성됐다.

 강동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경남 김해 봉황동 왕궁 추정 유적과 대성동 고분을 3차원(3D) GIS로 분석한 논문(‘GIS를 이용한 고대 경관의 재구성’)을 10일 서울대 국사학과 주최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GIS는 고지도나 고서, 고고자료 등을 토대로 옛 지리정보를 데이터베이스(DB)화한 것이다. 텍스트 중심의 사료를 시각화해 당대 공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배경을 파악하는데 용이한 연구기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논문에서 강 실장은 김해 봉황동과 대성동 일대 금관가야 유적 48곳을 왕궁과 서민 거주지, 농경지 등으로 분류했다. 이어 4세기 당시 지표면을 기준으로 해발고도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해발 약 2∼7m에 산재된 서민 거주지에서는 해발 30m 구릉 정상에 조성된 왕궁 내부를 볼 수 없었다는 게 확인됐다. 왕릉인 대성동 고분도 상대적으로 높은 해발 약 20m 지대에 있었다. 반면 왕성으로 진입하는 수로인 김해 해반천 유역에서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왕궁을 볼 수 있었다. 외국 사신 등 외부인에게 왕성의 위용을 과시한 것.

 강 실장은 “백성의 시야로부터 왕궁을 차단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위계를 구조화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읽힌다”며 “해상 교통로로 금관가야를 출입하는 외부인에게는 정치권력의 위상을 과시하는 랜드마크로 왕궁을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연구한 결과, 경주시내 구릉 정상에 지은 신라 월성과 평지에 조성된 서민 거주지의 고도 차이도 약 20m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강 실장은 “신라도 금관가야처럼 지배층이 조망 권력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GIS로 18세기 조선의 지방 교통망을 분석한 연구결과도 나왔다.

 엄기석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은 1757년(영조 33년) 295개 읍을 수록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1770년 문신 신경준이 전국 육로와 수로를 기록한 지리서 도로고(道路考)를 바탕으로 18세기 황해도의 도로망을 재현했다.

 이를 20세기 초에 제작된 지형도 위에 재구성한 결과 황해도내 145개 구간에 걸쳐 총 2613.44km에 이르는 도로망이 깔린 것으로 나타났다. 황해도내 23개 군현이 도로를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었다. 반면 황해도에서 수도 한양에 이르는 외부 도로망은 파주에서 합쳐지는 네 갈래 길로 비교적 단순했다.

 이처럼 외부 도로망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보니 황해도의 경우 조선 전기까지 바닷길로 조세를 거두는 조운이 이뤄졌다. 영조 때부터는 곡물 대신 동전으로 세금을 거두는 작전제(作錢制)가 시행됐다. 해운의 경우 풍랑에 따른 곡물 유실 위험이 적지 않아서다. 엄기석 연구원은 “외부 교통망이 내부 교통망에 비해 발달하지 않은 사실이 조세 수취체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