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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메랑 되어 돌아간 남의 가요

Posted October. 29, 201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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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자주 위해 한목숨 바친 그대를 나는 못 잊어/나의 작은 가슴에 빛을 준 사랑의 별/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우리 그대의 원한 씻으려/투쟁에 나서리.

1980년대 초중반 북한 젊은이들은 이 노래에 빠져있었다. 딱딱한 북한 노래와는 완전히 차별되는 달콤한 멜로디와 오랜만에 수령님, 장군님과 같은 단어가 빠져 있는 가사. 이 노래는 대남연락소 산하 칠보산전자악단에서 한국 노래 사랑의 미로를 개사()한 노래였다. 칠보산전자악단은 한국의 인기가요에 태양, 투쟁, 혁명 등의 코드를 심어 개사한 뒤 대남 방송을 통해 내보냈다. 그러나 이런 테이프가 민간에 흘러나와 젊은이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대다수는 한국 노래인줄도 모르고 대남당국이 심리전을 위해 특별히 따로 만든 노래로 알고 있었다. 이때가 북한에 한국 노래가 보급되기 시작한 1단계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개혁개방이 본격화한 중국에서 조선족들이 북한에 밀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친척집에 머무르며 중국 상품을 팔고 그 대신 수산물 등을 사들였다.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옌볜에 퍼져 있던 한국 노래가 북한에 들어갔다.

최진사댁 셋째 딸 목화밭과 같은 노래가 대표적이다. 북한 주민들은 이때도 이 노래들이 옌볜 노래인줄 알고 따라 불렀다. 1990년대 초반부턴 한국 노래가 퍼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바위섬 아침이슬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 등이 대표 유행곡이었다. 심지어 1990년대 중반엔 아침이슬을 합창으로 부른 군부대도 있었다. 한국 노래의 유입은 수십만 명의 탈북자가 발생했던 1990년대 후반에 더욱 가속화됐다. 중국에서 몇 년씩 머물며 TV나 노래방 등을 통해 한국 노래를 배웠던 탈북자들이 북송되거나 자의로 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노래가 아니라고 잡아떼거나 몰래 숨어 부르던 이때가 북한에 한국 노래가 흘러들어간 2단계라고 할 수 있다.

3단계는 71경제관리개선 조치가 발표됐던 2002년경부터로 볼 수 있다. 이때를 전후로 북한에 DVD 플레이어 붐이 일고 남한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할 것 없이 남한 노래인줄 뻔히 알면서도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송년회에는 바위섬, 생일축하 파티에선 친구, 군에 징집돼 가는 기차에선 이등병의 편지가 빼놓을 수 없는 고정 합창곡이 됐다. 북한에 퍼져 있는 한국 노래는 지금 100곡이 훌쩍 넘는다.

한국 노래 유입의 기원을 열었던 사랑의 미로는 여러 버전으로 개사돼 지금까지도 유행된다. 올 8월 북한에 들어갔던 중국 관광객은 북한 여종업원이 이 노래를 나의 얼은 가슴에 빛을 준 해발이여/이 세상 끝에 가도 영원히/우리 장군님 모습 빛나는/해 솟는 백두여로 고쳐 부르는 모습을 동영상에 담았다. 사랑의 미로의 대외 선전용 버전인 셈이다.

탈북단체인 NK지식인연대는 27일 북한주민들이 곰 세 마리 노래를 개사해 3대 세습을 풍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의 한국 노래 보급은 새로운 단계를 맞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정부가 남한 인기곡을 개사해 선전에 이용한 것이 북한에 한국 노래가 퍼지게 된 시초였다면 이제는 거꾸로 북한주민이 남한 인기곡을 개사해 정부를 풍자하기 시작한 것이다. NK지식인연대는 극도로 민감해진 북한 당국이 이 노래의 유행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주성하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