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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2002년 6월을 돌아보며 2010년 4월을 기억하자

[사설] 2002년 6월을 돌아보며 2010년 4월을 기억하자

Posted April. 28, 2010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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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제2함대 사령부에 마련된 천안함 46용사 합동분향소에는 이틀째 비가 내렸다. 분향소로 운용되는 체육관 건물 앞에선 군인들의 모습에선 육해공군이 따로 없었다. 제복을 갖춰 입고 절도 있게 조의를 표한 뒤 소속 부대로 돌아가는 장병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비장한 각오와 결의가 가득했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야 정치인들은 약속이나 한듯 방명록에 혹은 기자들 앞에서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2함대사령부 관계자는 2002년 제2연평 해전 때와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서울광장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각계 인사와 시민들이 추모행렬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천안함 장병들의 순국을 애도했다.

2002년 6월29일에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3마일이나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호를 선제공격해 윤영하 소령과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했다. 영결식장에는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국방장관도 합참의장도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참사 발생 다음날 일본에서 열리는 한일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성남비행장으로 가면서 5분 거리의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조차 들르지 않았다.

햇볕정책을 금과옥조로 반영한 당시 작전지침은 북한 해군의 NLL 침범에 대해서도 먼저 발포하지 말고 몸싸움으로 밀어내는 차단기동을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사실상 손발이 묶여버린 우리 해군은 적의 선제공격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셈이다. 쉬쉬하다시피 치러진 장례식 이후 고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 씨는 정부의 무관심과 냉대를 참다 못해 고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3년만인 2008년 4월에야 귀국했다.

천안함 사건은 대한민국의 안보가 마비되다시피 했던 과거 정권 10년의 후유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문제는 아직도 햇볕정책의 주술에서 깨어나지 못한 측면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2차 연평해전이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욱일승천의 무드를 비웃듯 도발한 것이라면, 천안함 사태는 원전수출과 동계올림픽 5위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유치에 도취된 듯한 대한민국의 옆구리에 비수를 꽂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후 경제살리기에 올인했지만, 안보도 동일한 수준으로 두터워졌는지는 의문이다. 부자 몸조심하듯 대양해군을 내세우며 북한을 깡마른 나룻배 취급하다 물밑 게릴라전에 일격을 당했을 수도 있다.

2010년 4월의 범국민적 추도물결 속에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일은 방심하면 당한다는 교훈을 구체화할 확고한 안보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안보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일거에 흔들리게 된다. 그것이 천안함 영령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