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대통령선거일을 10여 일 앞둔 12월 초순.
유력 대선후보 A 씨는 홀로 사는 노인들과 사랑방 간담회를 가졌다. 차가운 겨울 날씨 속에서 강행군 유세를 해 온 그는 따뜻한 온돌방에 앉자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았다. 한 할머니의 하소연을 듣다가 깜빡 졸고 말았다. 눈이 감긴 시간은 1, 2초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A 후보를 1년 가까이 밀착 촬영하던 경쟁 후보의 파파라치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몇 시간 후 주요 손수제작물(UCC) 인터넷 사이트에는 독거()노인을 더욱 서글프게 한 A 후보의 졸음이란 제목의 동영상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어떻게 어렵게 사는 할머니의 애원을 외면하고 잠을 잘 수 있느냐는 항의에 시달려야 했다.
가상 상황이지만 올해 대선 과정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그 피해자가 나왔다. 지난해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낙선한 당시 몬태나 주 상원 의원 콘래드 번스(72공화당) 씨. 그는 같은 해 8월 농장법안(Farm Bill) 공청회에서 깜빡 졸았는데 그 죗값이 아주 컸다.
이 장면이 상대 후보가 고용한 파파라치에게 포착됐다. 그 동영상은 곧바로 UCC 동영상 공유사이트인 유튜브에 올랐다. 며칠 사이에 10만 명 이상이 클릭했고 각종 블로그로 퍼져 나갔다.
몬태나 주 유권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어떻게 그런 중요한 청문회에서 졸 수 있느냐며 분노했다. 번스 전 의원은 누리꾼들이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웹 2.0 시대의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
전문가들은 대선의 해인 올해 한국 정가에는 UCC 쓰나미가 밀려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한국이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점은 이런 관측에 더 힘을 실어 준다.
주요 정당의 경선조차 시작되지 않았지만 한 컷으로 한 방을 만들려는 UCC 선거운동은 이미 물밑에서 시작됐다.
한 대선주자는 지난해 11월부터 정체불명의 남자 2명이 자신의 공개 행사를 빠짐없이 촬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반대 진영 측 인사일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어쩔 방법이 없다. 이 대선주자의 측근은 24시간 조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고건 전 국무총리, 손학규 전 경기지사 등 대선주자들은 최근 UCC 전문가를 영입하거나 UCC를 적극 활용한 선거전을 계획 중이다.
대선주자 진영들은 특히 TV 개그 프로그램의 인기 코너인 마빡이 방식에 주목한다. 우스꽝스러운 손동작을 반복하며 자기 이마를 때리는 이 코너는 인기가 높아지자 시청자들이 직접 새로운 동작을 개발해 마빡이 UCC를 제작하도록 했다. 방청객들의 박수로 가장 재미있는 UCC가 선택되면 그것을 개그맨이 다시 따라하는 식이다.
B 씨는 선거운동에서도 이 방식을 충분히 활용할 생각이라고 했다. 즉 우리 후보에게 가장 어울리는 연설 제스처를 동영상 UCC로 제작해 홈페이지에 올려 달라며 공모()한 뒤 유권자들의 투표와 후보자의 동영상 UCC 제작으로 관심을 증폭해 나간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렇게 재미있고 긍정적인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유튜브가 정치적 위력을 발휘한 것도 정치인의 말실수 등을 UCC로 제작해 유포하는 네거티브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UCC의 폭발력이 부정적으로 흐를 경우 자칫 이번 대선을 정책이나 현 정부 5년에 대한 평가 등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이미지 선거나 감성 선거로 이끌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에 대한 법적 제도적 대비책은 거의 없다.
대표적인 UCC 사이트인 판도라TV에는 요즘 하루에 동영상 UCC가 4500여 건씩 올라온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여과(filtering) 기능을 하는 직원은 40명에 불과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UCC를 악용한 저질 선거운동을 막기가 쉽지 않다.
임성규 중앙선관위 사이버팀장은 유권자의 합법적인 UCC는 선거운동 기간 선호 후보의 홈페이지에 격려나 지지 내용의 동영상을 올리는 정도라며 그 UCC를 다른 사이트로 퍼 날라도 현행 선거법 위반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누리꾼들의 일상사인 UCC 올리기와 퍼 나르기를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