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기 위해 서울을 떠난 2003년 1월 말. 노무현 정부 출범을 한 달가량 앞두고 국내에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었다.
TV 심야토론에는 평소 시위 현장에서 자주 보던 재야 인사와 진보 진영의 학자들이 출연해 거침없이 보수 인사들의 논리를 공박하며 공세를 취하곤 했다. 토론에 참석한 보수 인사들은 위축돼 있었다. 할 말을 자제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의 평양 방문 직후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핵 프로그램 보유 발언이 공개됨으로써 2차 북한 핵 위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새로 출범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우려가 훨씬 컸다.
워싱턴에 온 지 3년 반. 4일 귀국을 앞두고 되돌아본 그 기간은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기대는 사라지고 실망과 우려가 깊어진 시기였다.
북핵 위기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4차 6자회담이 끝난 지 1년이 다 되도록 후속 회담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채택으로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
한미 관계는 사실상의 이혼 상태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나빠졌다. 궤도를 이탈하기 직전처럼 불안하게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다. 동맹 관계에 이상이 있다는 발언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가 됐다.
노 대통령과 한국 정치인들은 북한 눈치 보기와 국내 정치용 발언으로 미국 조야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특히 한국과 미국에서 한 입으로 두 말하는 롤러코스터식 발언은 실망을 넘어 조소의 대상이 돼 있다. 할 말은 한다면서 국내에서는 막말을 하고 미국에는 사람을 보내 해명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국내에서는 우리 민족끼리의 자주 노선이 파탄했다는 평가가 공감을 얻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속았다는 주장이 나올 만큼 남북 관계에도 진전이 없다.
좌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편은 많지 않아 보인다. 각종 선거와 여론 조사의 결과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3년 반 전과 비교하면 한국 사회의 각 부문에서 극적인 반전이 이뤄진 셈이다.
귀국 인사차 접촉한 미국의 일부 한반도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해 봤다. 평소 햇볕정책을 지지했다는 한 전문가는 더는 이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렇게 퍼 주고 양보하고 눈치를 봤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북한에 아무런 영향력이나 지렛대(레버리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미사일 사태를 계기로 북한이 드러낸 주장과 논리는 햇볕정책이나 포용정책이 북한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한국의 안보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덕분이라니.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싫든 좋든 미국과의 관계와 한미일 공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남북 관계도 제대로 될 수 없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 참여정부의 실패한 대북 정책과 외교 정책의 유일한 성과인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비외교적이고 불필요한 거친 언사는 여전하고 아직도 미국에 할 말을 하는 것은 상식이라는 발언이 나온다. 현 정권 책임자들의 학습 능력을 의심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할 말도 때와 장소, 방법을 가려서 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 아닌가.
지난 3년 반의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가 주는 교훈으로 이른바 좌파 진보세력의 능력을 국민이 잘 알게 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 논리의 한계가 무엇이고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넉넉하게 보여 줬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