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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반성과 시류

Posted October. 12, 2005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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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게 3권을 통할()하는 비상대권을 부여한 유신헌법 발효 후 사법부는 사실상 독립을 상실하고 정치권력에 예속됐다. 유신 이후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정치권력의 압력에 항거하는 판결이 사법부 일각에서 나왔지만 다수 법관은 권위주의 정권에 순응했다. 전수안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최근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사법감시에 기고한 글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부끄러운 판결들은 많은 판사들이 의아해하거나 일반 국민과 똑같이 분노하였고 집에 가서 가족들 눈총을 받았던 판결이라고 썼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권위주의 정권 하의 시국사건 판결 기록을 모아 보겠다고 말한 뒤 사법부 내에 과거사 반성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유지담 대법관은 35년 몸담은 사법부를 떠나며 권력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외쳤어야 할 권위주의 시대에 침묵했다고 반성했다. 그 시절에 법관들이 많았지만 유 대법관처럼 솔직한 반성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유 대법관의 반성도 사법부 안팎의 기류에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 부장판사는 과거 판결의 잘못이 인정되면 대법원장이 법원을 대표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식 있는 법조인이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독재가 종식된 지 18년이 지나도록 과거의 부끄러운 판결에 대해 고해()하는 절차가 없었던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렇지만 전 부장판사가 과거사 반성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 요즈음의 시류()에는 맞는 것 같지만,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따져볼 여지가 있다. 전 부장판사는 유일한 여성 고법부장판사로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 물망에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나라의 모든 잘못이 과거사에서 비롯된 것처럼 과거사 청산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바람으로부터도 초연한 것이 진정한 사법권 독립이다. 권력의 풍향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보면 장래에 반성할 일을 다시 만들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자칫 대법관과 헌재 재판관 임명권을 가진 대통령을 의식해 과거사 반성 바람을 탄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황 호 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