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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아리랑 소년

Posted October. 10, 200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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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80년대에 중고교에 다녔던 40, 50대 중에는 카드섹션에 참여했던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전국체전을 비롯해 높은 사람이 참석하는 주요 행사엔 으레 카드섹션이 등장했다. 학생들은 스탠드에 앉아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형형색색의 카드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글자나 장면을 만들었다. 태극기, 무궁화, 대통령 초상 등은 단골 메뉴였다.

카드섹션의 생명은 일사불란()이다. 한 사람이라도 실수하면 작품에 흠집이 나기 때문에 학생들은 행사 한두 달 전부터 수업시간을 줄여가며 맹훈련을 해야 했다. 연습 중 틀리기라도 하면 담당 선생님에게 불려가 혼쭐이 났다. 카드섹션은 1980년대 후반 들어 학생들을 혹사()시키고 수업에 지장을 준다는 비난이 일면서 사라졌다. 요즘 축구경기장 등에서 보는 것은 동호인들의 자발적 행사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축전이 많은 북한은 카드섹션 강국()이다. 1950년대부터 김일성김정일 생일, 노동당 창건, 건군() 기념일, 해방기념일 등 각종 기념일엔 다양한 형식의 카드섹션이 벌어진다. 주로 학생들이 동원된다. 지금 평양의 아리랑 공연에도 2만여명이 동원돼 매일 현란한 대형 화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방대한 규모의 집단체조도 펼쳐진다. 이런 일사불란함을 통해 체제의 공고함을 선전하는 것이다.

북한 전문 사이트 데일리 NK가 탈북자들의 생생한 카드섹션 체험담을 공개했다. 훈련 중 코피를 쏟는 학생들이 속출하고, 동작이 틀리면 가차 없이 몽둥이가 날아온다. 소변을 오래 참아 방광염에 걸린 아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화려한 카드섹션 뒤에 어린 학생들의 이런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니 끔찍하다. 거대한 종이 감옥에 갇혀 무자비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아리랑 공연을 보겠다고 북에 간 남측 인사들은 그들의 고통도 보고 왔으면 한다. 아리랑 소년소녀들의 슬픈 재주에 박수 치면서 민족만 외치고 와서야 되겠는가.

송 영 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