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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외상값

Posted May. 17, 2005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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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어디 사람은 발가벗겨도 삼십 리는 간다는 속담이 있다. 옛날에 한 가게주인이 10여 년 전 외상값을 떼먹은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주인이 발가벗은 채로 삼십 리를 쫓아가서 외상값을 받아냈대서 생긴 말이다. 외상이면 소도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현금거래보다 추수한 뒤 갚는 외상이 더 보편적인 거래수단이었다. 이제는 신용카드라는 이름의 현대판 외상거래가 생겨났다. 신용카드로 소를 잡다가 신용거래불량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위에 흔하다.

외상 거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외상 거래를 배운다. 문방구로서는 단골을 확보하는 수단이고 미처 돈을 갖고 오지 않은 어린이들은 외상으로 학습용품을 준비할 수 있다. 동네가게에서는 안면이 익은 주민에게 외상잔액이 일정액을 넘지 않으면 언제든 외상을 준다. 오히려 고객이 발길을 끊을까봐 외상값을 다 갚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게도 있다.

부도위기에 처한 기업에 제일 먼저 걸려오는 전화는 술집의 외상값 독촉이라는 말도 있다. 과거 월급을 봉투에 담아주던 시절에는 인근 술집과 식당 주인들이 회사 근처에 진을 치던 시절도 있었다. 지난해 10월 집창촌에서 여성단체 회원과 주변상인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상인들은 직업여성의 외상값을 받아내기 위해 이삿짐 트럭을 막았다. 그러나 공무원은 신분이 확실해 가게주인들에게는 가장 믿고 외상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정부 과천청사 앞에서 식당을 하는 허모 씨가 모 부처 홈페이지에 외상값을 독촉하는 글을 올렸다. 공무원 외상이 많아 못살겠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과천청사 주변의 주요 음식점마다 수천만 원의 외상값이 깔려 있다고 한다. 좋던 시절에는 공무원이 외상을 달아놓으면 대신 갚아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회가 투명해지면서 이제는 그런 일이 점점 사라져 간다. 그렇다고 외상값 갚으라고 인터넷에 띄운 것은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임 규 진 논설위원 mhjh2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