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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의 행로

Posted February. 14, 2005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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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생활과 직업적 이유로 수천 편의 영화를 보았다. 로맨스와 어드벤처류의 영화를 특히 좋아하고 주말마다 최신작을 섭렵한다. 하지만 가장 감동 깊었던 영화를 고르라면 서슴없이 마빈 르로이 감독의 흑백 영화 마음의 행로를 꼽는다. 1942년 미국 MGM이 만들어 60여 년이 지나도록 영화 팬들을 사로잡는 추억의 명화다. 국내에서도 1954년 Random Harvest라는 원제목을 마음의 행로로 멋있게 의역()해 개봉됐다.

명문가의 아들인 찰스(로널드 콜먼)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전투에서 부상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종전이 되던 날 안개를 틈타 수용소를 빠져나온 찰스는 우연히 만난 댄서 폴라(그리어 가슨)와 결혼한 뒤 스미티란 애칭으로 불린다. 어느 날 자동차 사고로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사업가와 정치가로 대성하지만 최근 3년간의 행적을 기억하지 못한다.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단서는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열쇠뿐이다.

남편의 행방을 찾아 헤매던 폴라는 우여곡절 끝에 찰스의 비서로 들어가 그를 보필하다 한 남자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한 시절 남편과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애쓴다. 여러 해 뒤 어느 날. 파업 사태 해결을 위해 지역구에 간 찰스는 무엇인가에 끌린 듯 마을길을 따라 들어선다. 언젠가 왔던 것 같은 집 앞에 이른 찰스가 늘 갖고 다니던 열쇠로 현관문을 여는 순간, 자신의 옛 애칭을 부르는 아내의 음성을 듣는다.

최근 전해진 한국판() 마음의 행로는 이보다 더 애달프다. 추락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인이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과 결혼해 살아오다 20여 년 만에 옛 가족을 만나게 됐으나 여전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연이다. 여인은 사고 전 2남 1녀를 두고 있었고, 남편은 아내를 기다리며 수절()해 왔다고 한다. 자신을 지극정성 돌봐준 현재의 남편과 24년이나 기다려준 옛 남편과의 사이에서 고뇌하는 안타까운 마음의 행로가 아닐 수 없다.

오 명 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