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맨땅 '희생자' 속출

프랑스오픈 테니스대회가 열리는 파리 인근 롤랑가로스 스타디움은 강자의 무덤. 해마다 내로라하는 강호들이 초반 탈락하는 이변에 휘말리는 곳이다. 붉은 벽돌가루와 흙을 섞은 앙투카 코트는 표면이 느려 파워 플레이가 잘 먹히지 않는 데다 하드코트에 익숙한 선수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27일 열린 남자단식 1회전에선 상위 시드가 줄줄이 보따리를 쌌다.

최근 클레이코트 대회에서 우승 1회, 준우승 1회를 기록하며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힌 5번 시드의 로저 페더러(스위스)는 세계 88위의 무명 루이스 호르나(페루)에게 0-3(6-7, 2-6, 6-7)으로 완패했다. 지난해 8번 시드로 출전해 역시 이름조차 낯선 히캄 아라지(모로코)에게 첫판에서 진 데 이어 2년 연속 1회전 탈락.

현지에서는 페더러의 불운이 같은 스위스 출신 여자 테니스 스타 마르티나 힝기스에게 물려받았다는 묘한 분석까지 나왔다. 한때 세계 최강으로 이름을 날리고도 4대 메이저 타이틀 가운데 유일하게 프랑스오픈 우승컵만 따내지 못한 힝기스의 징크스에 빗댄 것.

페더러는 너무 실망스럽다. 이렇게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니 무척 슬프다. 이번 아픔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태국의 영웅인 10번 시드 파라돈 스리차판도 세계 62위인 도미니크 에르바티(슬로바키아)에게 1-3(4-6, 6-4, 0-6, 5-7)으로 패해 초반 하차했다. 98년과 2001년 대회 준우승자인 16번 시드 알렉스 코레차(스페인)도 세계 139위인 갈로 브랑코(스페인)에게 1-3(5-7, 6-3, 6-0, 7-5)으로 역전패, 고향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여자단식에선 27번 시드 알렉산드라 스티븐슨(미국)과 29번 시드 엘레나 리호프세바(러시아)가 1회전에서 나란히 하위 시드 선수에게 덜미를 잡혔다. 작년 대회에서 8강까지 오른 마리 피에르스(프랑스)도 1회전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반면 출전 남자선수 가운데 최고령인 2번 시드 안드레 아가시(33미국)는 세계 73위인 카롤 베크(슬로바키아)를 3-0(6-3, 6-2, 6-2)으로 제치고 이변의 태풍을 비켜갔다. 올 1월 호주오픈 우승에 이어 2연속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노리는 아가시는 올해로 이 대회에 15번째 출전했는데 예년보다 공이 무거워 플레이에 애를 먹었다며 낯선 볼도 이변의 또 다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여자단식에서 메이저 5연승을 노리는 세레나 윌리엄스는 1회전을 가볍게 통과한 뒤 미끄러운 클레이코트에서는 무엇보다도 다리 근력이 승부의 중요한 열쇠라고 말했다.

김종석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