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이 증거의 왕이었던 시절에 고문은 하나의 법적 제도였다. 조선왕조의 법률상 고문은 신장()으로 때리는 것이다. 신장은 길이 3자 3치로 손잡이쪽은 길이 1자 3치, 지름 7푼, 때리는 쪽은 길이 2자, 너비 8푼, 두께 2푼으로 버드나무로 만든다. 한번에 30회까지만 반드시 편편한 쪽으로 무릎아래를 때리되 정강이뼈를 때려서는 안되며 3일 이내에는 재신장을 금했다. 그러나 규격에 맞는 법장() 이외에 규격보다 크고 무거운 별장()이 공공연하게 사용되고 30회 한도가 무시되었으며 몸 전체를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태배(), 난장(), 주리틀기, 압슬(), 포락(윺), 단근()질 같은 법외고문도 자행되었다.
법적으로 금지된 후에도 고문은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며 더욱 은밀하고 교묘해졌다. 제5공화국 시절 어느 재야운동가는 한국의 상황을 빗대며 전세계 독재국가의 고문기법을 자세히 소개했는데 그 책에는 개밥고문, 방성구고문, 꽈배기고문, 물고문, 마르코스고문, 오물고문, 손톱고문, 개구리고문, 치아고문, 발바닥고문, 불침고문(잠 안재우기) 등 듣도 보도 못한 100여종의 다양한 고문기법들이 수록되어 있다. 바로 그 시절의 고문광경을 들여다보자.
각목 4, 5개로 만든 높이 1m, 길이 1.7m의 고문대 위에 담요를 깔고 알몸으로 눕게 한다. 담요를 말아 몸을 감싸고 발목, 무릎, 허벅지, 배 및 가슴을 결박한다. 눈을 밴드로 가린 뒤 두꺼운 수건으로 입과 코를 덮은 다음 그 위에 주전자에 담긴 물을 붓는다. 또 알몸으로 고문대 위에 눕게 하고 가슴, 사타구니, 발에 물을 뿌려 젖게 한 다음 위와 같이 몸을 결박한다. 그리고는 먼저 위의 물고문을 약하게 하고 이어 발가락에 전기도선을 연결한 뒤 처음에는 약하게 전류를 흘려 보내다가 점점 길고 강하게 흐르게 한다.
5공 치하에서 어느 민주인사가 당한 끔찍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 고문피해자가 여당 최고위원까지 되었던 이 시대에 우리는 다시 서울지검 11층 특별조사실에서 피의자를 화장실 쪽에 누이고 얼굴에 수건을 덮은 뒤 10여분간 서너 차례 바가지로 물을 부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고문의 질은 완화된 듯이 보이지만 사람들이 받는 충격의 양은 배가되었다. 그 특별조사실을 폐쇄한다고 하면서도 참고인을 강제구인하고 허위진술은 처벌하겠다고 눈을 부라리는 수사기관의 발상 속에서 우리는 다시 기어이 누군가의 자백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달갑지 않은 의지를 읽는다.
박 인 제 객원논설위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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