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뒤 던진 화두는 멀티플 플레이어(다기능 선수). 한마디로 여러 포지션을 두루 소화할 수 있는 만능플레이어가 많아야 한국 축구가 살아날 수 있다고까지 설파했다. 그리고 많은 멀티 선수를 발굴해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이 굳이 다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선수가 있었다.
준비된 만능플레이어 유비 유상철(31가시와 레이솔). 그는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기 전부터 멀티플 플레이어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수비가 허술할 땐 수비수로, 미드필드가 부실할 땐 미드필더로, 그리고 골잡이가 부족할 땐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기용되는 살림꾼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대표팀을 젊은 선수들로 물갈이하면서도 유럽 선수에 뒤지지 않는 체력과 스피드, 잡초근성을 겸비하며 만능플레이를 펼치는 유상철만은 꼭 챙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유상철의 진가는 그대로 드러났다. 폴란드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해 한국의 월드컵 첫 승을 확정짓는 쐐기골을 터뜨려 킬러본능을 맘껏 보여줬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8일 이탈리아와의 16강전. 한국이 0-1로 뒤지자 히딩크 감독은 홍명보와 김남일 김태영 등 수비수들을 모두 빼고 이천수 황선홍 차두리 등 공격수를 대거 투입해 총공세를 펼쳤다. 이때 그는 더욱 빛났다.
역시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던 유상철은 후반 중반 김남일의 위치인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고 홍명보가 빠지자 최후방 중앙수비수로 활약하며 한국의 수비라인을 철벽같이 지켰다.
유상철의 이 같은 플레이가 없었다면 연장전에서 안정환의 천금같은 동점골을 못 봤을 수도 있었다. 이 같은 그의 멀티플레이는 스페인과의 8강전은 물론 25일 열린 독일과의 준결승에서도 계속됐다. 그는 한국 월드컵 4강신화의 중심부에 있었다.
유상철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말투도 조용하다. 매사 세심한 데까지 신경쓰는 탓에 다소 여성스러운 성격으로 비친다. 그러나 그라운드에만 나서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거칠게 휘젓고 다닌다. 별명이 유비로 불리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
유상철은 독일전을 마친 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팀을 3위에 올려놓아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라며 아직도 투지를 잃지 않았다.
94년 처음 태극마크를 단 유상철은 독일전까지 A매치에 101회나 출전해 국내에선 차범근 최순호 홍명보 황선홍에 이어 다섯 번째로 A매치(국가대표간 경기) 100회 이상 출전 선수 모임인 센추리클럽에 가입한 영원한 태극전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