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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명함속의 권세

Posted October. 06, 2001 08:41,   

[오피니언] 명함속의 권세

높은 사람 집 대문의 문지방만큼 매끄러운 것도 없다는 아일랜드 속담은 세도가에 빌붙어 살려는 인간의 속성이 동서고금에 차이가 없음을 말해준다. 자본주의가 숭배되는 요즘 세상에서는 돈 냄새를 사방에 풍기는 부잣집의 문지방도 만만찮게 매끄러울 게 틀림없다.

혹 권력을 가진 사람의 집에는 금력의 소유자가, 그리고 부잣집에는 권력의 소유자가 기웃거리다가 일패를 이루며 서로 상대방 대문의 문지방을 빛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권세를 쥐고 있으면 금력을 보태려 들고 돈을 풍족하게 갖고 있으면 그걸 바탕으로 허전한 권력욕을 채우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마음 가난한 속물들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권력과 금력의 유착이 참혹한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보아 왔지만 그것은 법이 공정하게 집행될 때 가능했던 일이다. 막상 그런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스스로 예외가 될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권세라면 까짓 법쯤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거나 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들의 믿음처럼 이 나라에서 법은 정권을 잡은 쪽에만 한없이 너그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대상자에 따라 법이 달리 적용되고 집행되는 나라에서 권력과 금력의 소유자들이 결탁의 유혹에서 헤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주문이다.

벌써 한 달째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게이트들도 바로 그 범주의 일일 뿐이다. 고향 잘두고 세상 잘 만나 벼락출세한 세도가와 졸부들이 만나서 펼친 질펀한 잔치 후의 설거지는 그 형상이 얼마나 추악하고 역겨울 수 있는지를 한 장의 그림으로 보여준다. 사업보다 사기에 더 능한 젊은 기업인과 그 곁에 기생하던 조폭과 몇몇 정치인, 그리고 어떤 여당의원이 말한 일부 썩은 검찰과 국가정보원 및 경찰의 고위직 간부들은 모두 소란스러운 향연의 주인공들이었다.

더욱 안쓰러운 것은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후 보여진 당사자들의 행동거지다. 그들에게 애당초 정직성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였는지 모르지만 거짓말로 일관한 이용호 지앤지 그룹회장의 국회 증언은 어떤 작은 동물의 교활함을 연상케 한다. 명색이 검사장이라는 사람이 사기꾼 기업인에게 5촌조카의 취직을 부탁했는지 여부를 놓고 말을 바꾸는 모습은 그 큰 자리를 선망해 온 많은 범부들의 마음을 한없이 슬프게 한다.

비록 부탁은 하지 않았다지만 신승남 검찰총장과 안정남 전 건교부장관 동생들의 취직은 과연 당사자들 주장처럼 그렇게 떳떳한 일일까. 검찰총장의 동생이 아니었다면 6000만원이 넘는 거액을 손아귀에 쥐어 주면서까지 일자리를 바칠 정신나간 사업가가 세상천지에 있을까. 이 문제에서 신 총장이 비록 법적 책임은 없다해도, 그렇다고 국감장에서 야당의원들과 한 치 양보없이 설전을 벌일 만큼 당당한 입장이라고 여겨 줄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안 전장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류판매업자들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국세청의 수장이 아니었더라도 업계가 그 동생에게 같은 대우를 했을까. 동생 문제와 재산 형성에 대해 안 전장관이 그토록 설득력 없는 변명과 말 바꾸기로 형국을 돌리려 하기보다 일찌감치 고개를 숙였더라면 혹 관운의 임종만은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자리에 오르려고 막판 세무조사에 얼마나 애를 썼는데 마니산의 정기조차 결국 그를 외면하고 말았다.

고관대작 형들 모르게 일어난 일이라는데도 많은 국민이 신 총장과 안 전장관에게 고개를 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명함속에 권세가 들어있는 존재, 즉 직책 그 자체가 권력을 상징하는 자리의 사람은 권세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사사롭게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단속할 책무도 갖는다. 인척이 권세의 명함을 팔고 다니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좌절과 분노의 한숨으로 가득 차고 노동과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 될 뿐이다.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집권자와 그의 관료들은 비생산적 근로자들이다. 그들은 공공의 심부름꾼으로서 국민의 근로생산물로 유지되는 존재들이다라고 말했다. 국민이 힘겹게 만들어 나라에 바친 근로생산물을 바탕으로 형성된 권세라면 그것은 개인의 가족이 나눠 가질 대상이 결코 아니다. 심부름하라고 모아 준 명함속의 권세를 단속하지 못했다면 그는 공인의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이규민(논설위원)



Lee Kyu-Min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