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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탈북

Posted July. 28, 200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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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에서 서울 도착까지의 기간도 급속히 단축되고 있다. 북한을 떠난 지 불과 8일 만에 한국에 입국한 사례가 지난달 처음 등장했으며 탈북 한 달 만에 입국한 경우도 최근 6건이나 된다. 대량 탈북과 속도가 상승작용을 하며 탈북러시를 가속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5000명을 넘어선 탈북자들의 한국사회 정착은 수시로 멈춰서는 완행열차 수준이다. 탈북자들의 적응에도 문제가 있지만, 이들을 시민의 일원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도 문제다.

한국행 초특급 노선=함북 청진시에 살던 한은희(가명•60)씨는 작년 봄 탈북한 딸로부터 전갈을 받았다. 중국에 살고 있으니 오라는 내용이었다. 고향을 떠나기 싫었지만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에 흔들려 잠시 여행하는 셈치자며 몰래 두만강을 건넜다.

한씨는 연길에 도착한 뒤 딸이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산다는 사실을 알았다. 딸과 전화통화하며 미쳤다고 야단을 치긴 했으나 결국 딸의 호소에 마음을 돌려 한국행을 결심했다. 1000만원을 받은 브로커는 한씨를 조선족으로 위장시키기 위해 위조여권을 건네줬다. 한씨는 장춘으로 이동해 서울 직항편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청진을 떠나 한국에 도착하는 데 걸린 기간은 불과 23일이었다.

최근 탈북은 루트가 다양화할 뿐 아니라 탈북-중간지-한국행의 기간이 갈수록 단축되는 추세다. 성공확률이 높은 루트가 개발되면서 중간 체류기간이 대폭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입국해 탈북자 정착 지원시설인 하나원에서 교육받고 있는 탈북자 A씨의 경우에는 탈북에서 입국까지 불과 8일밖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5000명이 넘는 국내 탈북자 가운데 최단 기록. 관계자들조차 초특급 탈북에 놀라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면밀히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일부 탈북자의 한국행 과정은 마치 해외 배낭여행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통계에서도 한국행 탈북열차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입국한 탈북자 503명 중 중국 체류기간이 1년 미만인 사람은 전체의 12.1%(61명). 그러나 올 상반기 입국자 760명 가운데 1년 미만 중국 체류자는 38%로 껑충 뛰었다.

올 4월에는 탈북 후 6개월 만에 입국한 비율이 32%나 됐다. 5월 입국자 80명중 이 비율은 25%(20명)로 여전히 높다. 지난달 입국한 6명 가운데는 불과 1개월 만에 초특급으로 입국한 사람도 6명이나 됐다.

정착은 완행=북한의 유명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던 전모씨(여•30)는 올 3월 입국해 전공에 맞는 직업을 구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현재 서울 동대문의 한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고 있는 그는 우울증세를 보이고 있다.

98년 입국한 이모씨(38)는 정수기 판매업체의 영업직원으로 일하며 나름대로 한국사회에 안착했다. 그러나 우연히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 미래의 장인을 찾아갔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가족을 버리고) 온 사람에게 딸을 줄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꿈에 부풀어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경제적인 측면 외에도 사회적 이질감과 거리감을 여전히 좁히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탈북자 552명의 의식을 조사한 연세대 의대 전우택교수(정신과)는 탈북자들은 처음 입국할 때는 자신감에 차있고, 설사 잘 살지 못하더라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성공 가능성을 회의하고 있으며, 무시와 차별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입국한지 오래될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사회 정착의 1차 책임을 갖고 있는 탈북자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지난해 통일연구원이 탈북자 7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의 취업률은 39.8%, 월 평균소득은 74만원이었다.

그러나 한 탈북자는 조사결과는 실제상황과 다르다며 상당수 탈북자들이 정부지원금을 받기 위해 취업을 하지 못했다고 답변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일부 탈북자들은 남한사람들이 기피하는 3D직업을 왜 우리가 해야 하느냐고 되묻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40대 탈북자 K씨는 지난해 남한사람과 똑같은 일을 했는데 왜 월급을 80만원 밖에 주지 않느냐며 항의하며 서울 영등포시장의 도매상 배달 일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통합으로 가는 길=문제는 탈북의 동기와 탈북자의 구성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원웅 관동대 교수(북한학과)는 탈북자의 구성과 탈북 동기가 과거와 달리 이주민의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다.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한국행을 선택한 귀순이나, 입에 풀칠하기 위한 생계형 탈북을 지나 이제는 더 나은 삶을 찾아 한국으로 대량으로 이주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탈북자들도 기본생계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윤여상 경남대 교수는 이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지원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면서 사회 전체가 탈북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내 탈북자가 2만명을 넘어선다면 정부는 더 이상 통제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두 차례에 걸쳐 탈북자 468명이 대거 입국하기 직전인 26일. 국내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터진 봇물 같은 탈북자의 입국행렬에 이런 분석을 내놨다.

이번의 탈북자 대거 입국이 탈북사태를 촉발할 것으로 단정짓기는 이르다. 하지만 이미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체류 중인 탈북자 10만여명이 제3국을 통해 한국행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만드는 영향은 미칠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 관계자가 제기한 가설은 현실화될 것인가.

사라진 탈북자들=3, 4년 전만 해도 북한 국경에서 자동차로 불과 2시간 거리인 중국 옌지()시 중심의 옌볜교회 앞에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탈북자들을 쉽게 만났다. 시장골목에는 돈을 구걸하고 물건을 훔치는 탈북 꽃제비(유랑아)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2004년 현재 이곳에서 허름한 행색의 탈북자들이나 꽃제비들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북한 무산과 인접한 중국 마을에 사는 조선족 심모씨(36)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겨울에 강을 건너와 며칠씩 묵고 가는 탈북자들이 20여명이나 됐지만 최근에는 밀수꾼들만 드나들 뿐 탈북자들은 거의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두만강을 넘는 탈북은 일단 2002년 말을 기점으로 소강상태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일부 탈북지원 민간단체는 현재까지의 탈북자수를 최대 20만30만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은 지난해 그 수를 10만여명으로 추산했다. 그 많은 탈북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중 일부는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으로 이송됐다. 올 5월 미국 난민위원회(USCR)는 지난해 중국에서 체포돼 송환된 탈북자 수가 7800여명이라고 집계했다.

함북 청진에 살다가 최근 입국한 탈북자 정모씨는 우리 인민반(3050호)에만 중국에서 잡혀와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이 3명이나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어디로 향할까?=문제는 중국에 숨어있는 탈북자들의 향후 행로. 이들 중 10%만 한국행을 선택해도 1만2만명에 이른다.

대부분의 탈북자는 이미 북-중 국경지역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6년간 탈북자들을 보호 지원해온 원모씨(42옌지시 거주)는 기존의 탈북자들은 이미 대부분 중국 내륙으로 이동해 정착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한국행을 선택할지 여부가 향후 국내 탈북자 숫자를 좌우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북한에서 추가 탈북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입국한 탈북자 최모씨(38)는 중국에 5년간 살면서 말을 익히고 적응했다며 비슷한 처지의 탈북자 5명과 함께 광저우()에서 일자리를 갖고 생활했다고 말했다. 광저우는 북-중 국경에서 수천km나 떨어져 있다.

최씨는 중국에서는 언제 체포될지 항상 불안했다며 한국에 가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한국행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최씨처럼 중국이나 한국에 마땅한 연고가 없는 무연고 탈북자들은 대부분 한국행을 염두에 두고 있다.

피랍탈북인권연대 도희윤 사무총장은 일단 중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목숨을 걸고 제3국 국경을 통과하면서 조급하게 한국행을 감행하지는 않는다며 그러나 비용과 정보, 안전이 확보된다면 대거 한국행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중국이 탈북자 체포와 송환을 강화하면 탈북자들의 한국행은 가속될 수 있다. 무연고 탈북자의 한국행이 이어지면서 무연고가 연고를 낳는 효과가 나타나면서 국내 탈북자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도 있다.



황유성 주성하 yshwang@donga.com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