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들의 저녁 식사를 만든 임상수 감독의 영화 바람난 가족은 불친절하고 불편하다. 부부인 영작(황정민)과 호정(문소리)은 각각 사진작가, 옆집 고교생과 혼외정사를 벌이는데 이 사실을 서로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다. 시어머니 병한(윤여정)은 간암 말기인 남편을 두고 초등학교 동창과 정사를 즐긴다. 이 가족이 왜 이렇게 사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이 가족의 엽기적 일상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과장됐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판타지를 송두리째 부순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그래서 지금껏 적당히 모른 척하고 살아온 가족들의 코 앞에 현실을 들이미는 감독이 얄궂다.
영화에서 바람난 가족들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허무한 섹스 끝에 가족의 소중함도 깨닫지 않는다. 호정은 남편 앞에서 자위를 할만큼 넌 만족을 못준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하고, 영작도 그것을 심드렁하게 쳐다본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 아내를 살해하는 해피엔드처럼 배우자의 외도를 다른 영화중 결혼 제도의 손을 들어준 것도 적지 않지만 이 영화는 현실은 이래. 넌 어떻게 살래?라고 뻔뻔하게 묻는다.
영작과 호정은 쿨(Cool)하다. 배우자의 바람에 대해 악다구니쓰지 않는다. 영작은 내가 딴 여자 좀 만나고 다니는 게 무슨 문제니?라고 말하고 호정은 그런 그에게 잘 지내보라는 식이다. 영작이 호정의 외도에 대해 퉁명스레 물으면 너나 잘해라고 말한다.
이쯤되면 바람난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현대의 가족이 겪고 있는 딜레마를 대변한다. 결혼하면 섹스는 맘껏 하겠구나 기대했는데, 중성 취급 당한다는 호정의 말처럼 결혼은 상대방에게 성적 매력을 잃어가는 자신을 지켜보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이 영화에서 가족은 그저 자신이 사회적 다수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장치일 뿐이다.
영작 부부가 입양한 아들 수인이 죽는 장면은 가족에 대한 임 감독의 직설 화법을 보여준다. 알코올 중독자인 지루(성지루)는 영작에 대한 복수로 수인을 납치해 공사 중인 건물에 올라가 한치도 주저도 없이 던져버린다.
임 감독은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힘든 인생에 연애가 힘이 된다면, 까짓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냐며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며 힘들어하지 않고 그저 저렇구나라고 낄낄거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미혼에게는 결혼이 다 저런가 싶고, 기혼에게는 저렇게까지 낱낱이 말할 필요 있나 싶어서 이래저래 불편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터무니없는 판타지에 당한 인상은 아니어서 불쾌하진 않다. 15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