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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가 허행-한국화가 김혜진, 그녀들의 한집살이

전각가 허행-한국화가 김혜진, 그녀들의 한집살이

Posted September. 06, 2005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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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전각(돌 나무 등에 글자를 새기는 작업) 작가 허행(50) 씨 집 초인종을 누르니 한국화가 김혜진(52) 씨가 나왔다. 두 사람은 3년 전 살림을 합쳤다. 아담한 울타리 안에 있는 두 채의 단독 주택을 한 채는 살림집으로 한 채는 공동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방 두 개와 마루를 일자로 튼 작업실 한쪽에는 허 씨의 전각 작업 책상이, 한쪽에는 김 씨의 그림들과 한지, 물감들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비평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 가장 친한 동료로 네 자식, 내 자식 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로 살고 있다.

김 씨는 미대를 졸업하고 20여 년 넘게 박꽃을 그려 오고 있다. 한지 위에 은은하게 번지는 물감의 일렁거림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박꽃은 하나도 똑같은 게 없다.

시집을 펴낸 시인이기도 한 허 씨는 미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전각가로 변신하게 된 것은 바로 김 씨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10여 년 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이웃사촌으로 만났다. 당시 똑같이 삶에서 가장 어려운 고비에 놓여 있었다. 김 씨는 이혼 직후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였고, 허 씨 역시 20년 미국 이민 생활을 청산하고 남편만 남겨두고 아이들과 귀국한 상태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한국말이 서툰 허 씨네 아이들에게 김 씨네 큰 딸이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시작됐다. 아이들이 다리가 돼 친해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김 씨가 그림을 그리면 허 씨는 옆에서 책을 보거나 시를 지었다. 허 씨의 필체와 한문 실력을 눈여겨 본 김 씨는 난데없이 허 씨에게 낙관을 찍어 달라고 졸랐다. 주저하는 허 씨에게 김 씨는 전각도까지 사다 주었다.

허 씨는 돌에 칼을 대면서 무생물인 돌 하나하나가 결이 각자 다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가며 신기해 했고, 작은 공간 안에 무한을 표현하는 순간의 미학에 재미를 느꼈다. 그녀는 독학으로 전각에 몰두했고 마침내 10년 가까운 세월을 바쳐 어엿한 전각 작가가 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수수하고 담백한 게 장점. 흔히 전각하면 떠오르는 어려운 한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한글과 쉬운 형상을 택했다. 낙서 같기도 하고 잘 쓴 서예가의 글씨 같기도 한 그녀의 작품은 혼자 책 보고 연구한 결과물이라는 게 더 놀랍다.

가장이 된 두 사람의 지난 세월은 전쟁이었다고 했다. 허 씨는 귀국 이후 막노동에 버금가는 백화점 디스플레이어로, 김 씨는 주부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으면서 아이들 양육과 작업을 병행해 왔다. 두 사람의 성격은 아주 다르다. 아이들을 키우는 데도 허 씨는 자유방임이고 김 씨는 열혈엄마다. 김 씨는 밤새 작업하는 올빼미 형이고 허 씨는 백화점에서 퇴근 후 저녁시간을 이용한다. 아이들 아침식사는 허 씨 몫이고 저녁에 퇴근하는 허 씨를 위해 저녁식사를 만드는 것은 김 씨 몫이다. 김 씨는 허 씨를 지성과 인간미를 갖춘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멋있는 사람이라 치켜세웠고, 허 씨는 김 씨를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솔직한 천사라고 했다. 이들에게 남편의 빈자리, 아빠의 빈자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예년엔 9월이 되면 집에서 9월전이라는 이름의 조촐한 합동전을 열었던 두 사람은 올해는 허 씨가 먼저 서울 종로구 화동 스페이스 아침(02-723-1002)에서 26일까지 개인전을 하고, 김 씨는 10월 618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아트페어 마니프(MANIF)에 참가한다.



허문명 ang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