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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우리 함께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우리 함께

Posted December. 01, 2007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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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월 24일, 세계 언론은 한 프랑스 철학자의 죽음을 알렸다. 여든넷의 노()철학자가 불치병으로 24년 동안 고통받아온 아내와 함께 파리 근교의 시골 자택에서 나란히 누운 채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동반 자살이었다.

그는 장 폴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했던 앙드레 고르(19232007). 우리에게 다소 낯선 고르의 이력을 살펴보자.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 열여섯 살 때 독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스위스 로잔으로 건너감. 1946년 사르트르를 만난 이후 실존주의와 현상학을 탐구. 1950년대 파리에서 언론인으로 활약. 1960년대 신좌파 주요 이론가로 활동하며 68혁명에 영향. 1970년대 마르크시즘에서 벗어나면서 녹색정치 생태정치의 기치를 올림.

이 책은 고르가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인 2006년 봄, 아내 도린에게 쓴 사랑의 편지다. 그동안 수많은 글을 써 왔지만 정작 아내를 위해 쓴 글이 없음을 깨닫고 장문의 편지 한 통을 쓴 것이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주변의 권유로 2006년 파리에서 책(원제 Lettre 'a D-Histoire dun amour)으로 나왔고 오랫동안 읽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란 상찬과 함께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말 번역본은 프랑스 갈릴레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역자 후기와 추천사를 별책으로 꾸몄다. 고르 편지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다른 글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갈릴레 출판사의 생각이었다.

여든셋 노 철학자의 편지는 첫 문장부터 가슴을 저미게 한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cm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kg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줄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편지는 도린과의 사랑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사랑은 때론 폭풍처럼 격렬하고 때론 거울처럼 투명하다. 그가 회고하는 한 살 연하 도린과의 세 번째 우연한 만남.

부지런히 뛰어가 총총히 길을 걸어 내려가는 당신을 따라잡았습니다. 눈이 온 날이었습니다. 습기에 젖은 당신의 머리칼이 고불거렸습니다. 설마 동의할까 싶으면서도 나는 춤추러 가자고 제안했지요. 당신은 대답했습니다. 와이 낫(Why not). 좋다고. 담백하게. 1947년 10월 23일이었습니다.

한 여인에게 푹 빠져가는 청춘의 순수함이 눈 내린 풍경처럼 선명하다. 고르가 말하는 사랑과 결혼 이야기는 일종의 철학이고 사상이다.

사랑이란 두 주체가 서로 매혹되는 일 사회가 강요하는 자기들의 역할과 이미지와 문화적 구속을 거역하면서 서로에게 빠져드는 일입니다.

진취적인 철학을 탐구해 온 고르의 취향이 그의 사랑 철학에도 잘 드러난다.

고르는 1950년대 프랑스 지성계에 등장한 이래 철학적 사상적 편력을 뒤돌아보면서 그 한 축에 부인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마르크시즘에서 벗어나 생태정치주의자로 방향을 바꾸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83년, 아내가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불치병에 걸리자 시골로 내려가 부인의 간호에만 전념했다. 아내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수시로 그를 괴롭혔다. 그럴수록 사랑은 더욱 절절해졌다.

나는 더는조르주 바타유의 말처럼실존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온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걸 당신이 느끼게 해 주고 싶습니다.

고르의 사랑은 철학적이면서 인간적이다. 책을 읽는 내내 좋은 철학자였고 선량한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을 덮고 문득 창문을 열었을 때, 뽀얀 설경()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



이광표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