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마주보고 인정할 때 비로소 떠나보낼 수 있다. 개인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개인과 역사의 상처를 완전히 다른 결로 그려낸 두 연극을 만나보자.
●연극 ‘정희’
서울 후계동의 오래된 술집 ‘정희네’. 혼자 가게를 꾸리는 정희는 버텨내듯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인사하며 집을 나서고 싶고 일이 끝나면 돌아갈 집이 따로 있으면 좋겠다. 술집 위층에 있는 방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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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정희’에서 정희가 생각에 잠겼다. 정희가 옛 남자친구 상원(겸덕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안과 대화하는 정희. 어린 시절 정희와 동훈, 상원.(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T2N미디어 제공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년)에 나온 정희의 이야기를 별도로 풀어낸 창작 연극으로, 초연이다. 드라마에서는 오나라 배우가 정희 역을 맡았다. 드라마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정희를 중심에 놓고 독립된 이야기를 만들었다.
‘정희네’는 정희의 삶이 그대로 담긴 곳이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집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휑한 그 곳에 혼자 있기 힘들어 친구들을 불러 어울리다가 ‘정희네’를 열게 됐다.
이야기는 정희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밝았던 소녀가 할머니를 잃고, 온 마음을 쏟았던 남자친구 상원이 출가해 스님이 되면서 상처는 쌓이고 또 쌓인다. 그런 정희에게 세상 풍파에 할퀴어진 지안이 의탁하게 된다.
드라마처럼 연극 역시 사람 간의 관계와 감정을 세밀하게 짚어낸다. 누구나 제각기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묵묵히 비춘다. 정희, 지안, 스님이 된 겸덕, 그리고 가람. 이들의 고민과 면면에서 관객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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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은 고요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연기를 통해 극을 밀도 있게 떠받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들려준 가슴 울리는 대사들을 다시 음미하는 시간도 선사한다.
정희 역은 이지현 오연아 정새별이 맡았다. 겸덕과 어린 상원은 이강우 김세환 이태구가 연기한다. 지안과 어린 정희 역에는 박희정 박세미 권소현이 발탁됐다. 가람과 어린 동훈은 허영손 강은빈이 연기한다.
6월 14일까지. 서울 종로구 예스24 아트원3관. 14세 이상 관람가능.
● 연극 ‘빵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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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을 의인화해 일제강점기부터 근현대까지, 아픈 우리 역사를 비춘다. 1945년 2월 인천 조병창에서 태어난 빵야. 짐작할 수 있듯 빵야는 일본군 장교, 독립군, 포수를 비롯해 학도병, 인민군 등을 거치며 처절한 상흔이 생긴 현장 곳곳에 있었다. 창작 연극으로 2022년 초연돼 2024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무대다.
연극 ‘빵야’에서 의인화된 소총 빵야는 일제강점기부터 근현대까지 자신이 겪은 험한 세월을 이야기한다.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연극 ‘빵야’에서 소총 빵야를 살펴보는 드라마 작가 나나.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역사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스러지고 어떤 비극을 마주하는지 빠르게 펼쳐진다. 편성을 따내기 위해 작품을 수정하고 결정권자들을 만나 고개 숙이는 나나의 고군분투가 맞물린 액자식 구성은 속도감을 더한다.
이 땅에서 전쟁은 끝났지만 자본의 지배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 다른 분투를 벌여야 하는 현실은 계속되고 있다. 빵야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나나는 역사를 비추는 각도를 자본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지 고민한다.
연극 ‘빵야’에서 소총 빵야가 거친 현장을 연기하는 배우들.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장면 전환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배우들은 집중력 높은 연기로 몰입도를 높인다. 천진한 소년과 소녀, 강아지 등을 앙증맞게 표현해 전쟁의 비극을 또렷하게 대비시킨다.
극은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드라마를 위해 밀고 당기고 술 마시다 어느 새 정이 드는 나나와 제작자의 줄다리기는 웃음을 준다. ‘오빠는 풍각쟁이’를 깜찍하게 부르는 소녀, 강아지와 뛰어노는 모습은 포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악기가 되길 꿈꾼 빵야. 그 소원을 마침내 구현한 무대는 희망을 그린다.
5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14세 이상 관람가능.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