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소멸의 시학’展 과일 부패 과정 시청각적 표현 등 끝내 분해-소멸 50여점 선보여 “미술관 역할, 작품 보유 아닌 보호”
최근 서울 종로구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정원에 들러 봤다면, 곳곳에서 ‘초(草)사람’이란 작품을 마주할 수 있다. 고사리 작가가 미술관 내 잡초를 베어 눈사람 모양으로 뭉친 것. 앙증맞은 모양새가 행인의 시선을 잡아끌지만 우려도 든다. 녹지야 않겠지만, 겨우내 볕과 바람에 삭을 이 작품을 미술관은 어떻게 소장할 수 있을까.
끝내 분해되고 소멸하는 작품 50여 점을 선보이는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가 지난달 30일 개막했다. 이른바 ‘불후(不朽·썩지 아니함)의 명작’을 보관하고 그 가치를 유지하려 애쓰는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전시다. 이주연 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우리말 ‘삭다’는 발효돼 맛이 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며 “썩는다는 부정적 뉘앙스를 넘어 작품을 관람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 썩어가는 과정 또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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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소멸의 시학’전에 전시된 아사드 라자의 ‘흡수’. 서울에서 나온 폐기물로 토양을 만들었다. 분해와 소멸에 내재된 특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관람객은 이 흙을 조금씩 집에 가져갈 수 있다. 뉴시스
사물이 부패하는 과정도 이번 전시에선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일본 작가 유코 모리의 ‘분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과일이 익고 부패하는 과정을 시청각적으로 표현했다. 선반에 놓인 과일에 꽂힌 전극이 변화하는 수분량을 측정하고, 이에 따라 과일과 연결된 조명의 세기와 깜박임,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의 높낮이 등이 바뀐다.
향이 타며 피어오르는 연기의 움직임을 ‘춤’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하는 여다함 작가의 ‘향연’. 뉴시스
● 미술관은 작품의 ‘보호자’
과테말라 출신 작가 에드가르 칼렐의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는 미술관이 무엇을 위한 장소인가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전시장 넓게 포진한 이 작품은 돌 30여 개를 제단 삼아 과일과 채소를 올려뒀다. 제물은 모형이 아닌 진짜이기에 점차 삭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교체된다. 고대 마야 문명에 뿌리를 둔 모국의 칵치켈 부족이 땅과 조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올리는 제의 풍습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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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나설 즈음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의 콜린 스털링 교수가 전시 관련 기고에 인용한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을 곱씹게 된다. “사물이 분해돼 가는 모습을 ‘2번째 삶’으로 인식할 수 있고, 기억에 의해 매개된 그 2번째 삶에 사랑이 머문다.” 5월 3일까지.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