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하지만 약속한 날에 비가 왔다. 자연광에서 찍고 싶어서 다시 어렵게 날을 잡았다. 그렇게 화창한 날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중 한 마리는 올봄에 세상을 떠나 우주의 먼지가 됐다. 당시 도망가려는 고양이를 안고, 다섯이 가족사진을 찍었다. 오늘의 사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몇 년 전부터 수첩에 하루를 메모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컴퓨터를 멀리하고 유일하게 종이 위에 만년필을 쓰는 시간이다. 하루에 있었던 일을 암호 같은 단어로 기록한다. 펜을 들면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적는다.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대화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지, 운동은 했는지 등 기록하지 않으면 그냥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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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에빙하우스는 기억과 망각에 대한 과학적 실험 연구를 진행한 독일의 심리학자이다. 그는 1880년 ‘기억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기억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빠르게 감소하다가 점점 완만해지고 최종적으로 뼈대만 남는다는 ‘망각 곡선’을 최초로 발표했다. 복습과 반복 학습이 기억을 강화할 수 있다는 심리학적 모델도 개발했다. 이 이론은 지금까지도 교육과 학습 전략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억과 양자역학 사이에 관련성이 있을까? 로저 펜로즈와 스튜어트 해머로프는 1994년 ‘조율된 객관적 붕괴 이론’을 발표했다. 인간 의식의 근원을 뇌 속에서 진행되는 양자물리학 과정에서 찾으려는 가설적 이론이다. 그들은 뇌의 미세소관에서 양자 중첩이 형성되며, 이 중첩이 붕괴하는 순간이 ‘기억의 순간’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스웨덴 출신 물리학자 맥스 테그마크는 2000년 뇌에서의 양자 중첩은 의식을 처리하는 생물학적 시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짧아 기억은 양자물리학과 연관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조율된 객관적 붕괴 이론’이 언제, 어떻게 부활해 발전할지는 모른다. 인간의 기억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려는 접근은 매력적이다.
올해 내가 잘한 일이 무엇이고, 잘하지 못한 일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잘한 일은 생각나지 않고 아쉬운 일만 떠오른다. 그 이유가 뭘까? 양자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른 것을 다 떠나, 올해 제일 잘한 일 가운데 하나는 가족사진을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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