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 주저한 盧, 자리 박차지 못한 韓 장삼이사 아는 정답을 이들은 왜 모르나 ‘어두운 기운’ 덮쳤는데 유불리 따져서야 내가 한덕수, 노만석이라면… 나는 다를까
김승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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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사직한 노만석 전 검찰총장 대행은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대장동 사건을 항소한 뒤 징계를 받든 어떻든 정면승부 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늦었다.
노 전 대행은 문제의 금요일 오후 5시 30분 아직 항소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6시간 남짓 세 가지 선택지를 놓고 면밀하게 후과(後果)를 따져봤을 것이다. 항소 재가를 받도록 정성호 법무장관을 설득할 것인지, 장관 뜻을 거슬러 항소장을 접수시킬 것인지, 아니면 장관 메시지처럼 “신중하게 검토”한 뒤 항소를 포기할 것인지 등이다. 그는 대검찰청 검사장들, 서울중앙지검장과도 상의했다. 스스로를 무사요 칼잡이라 부르는 이들의 집단적 선택은 놀랍게도 가장 손쉽고, 그래서 비겁한 세 번째 ‘항소 포기’ 시나리오였다.
항소를 밀어붙였다면 어땠을까. 노 전 대행은 권력 앞에 고개 숙인 검찰 굴욕사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작금의 상황을 모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행 자리를 지켰을 수도 있다. 그날 밤 11시 기류를 파악한 언론이 첫 보도를 하기 전에 항소장을 법원에 제출했다면 장관이 법무차관을 통해 의견을 전달한 전모는 비밀에 부쳐졌을 수 있다. “나는 경영자” “용산 법무부 관계를 고려”라고 실토해 망신을 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법무장관으로선 특별한 지휘를 한 것이 없다는 입장이니 문책받을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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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 총리는 항의의 뜻으로 사의를 밝히고, 그런 뒤 몇몇 장관들과 함께 국무회의장을 박차고 나섰다면 계엄은 불발됐을까. 아닐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고, 특전사 등 계엄 병력은 출동 채비를 다 갖춘 때였다. 계엄 선포를 막았더라도 기획 사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어마어마한 정치적 파장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용산 대통령실에서 몸을 던졌다면 한 전 총리는 윤 정부의 2인자였다는 정치적 책임과는 별개로 지금 같은 수모와 사법적 고초는 피할 수 있었다.
한덕수 노만석 두 공직자는 운명적인 오판을 했다. 머리로 꾀를 내지 않고 마음으로 큰 판을 읽었더라면 용기 있는 참공직자로 박수 받았을 일이다. 결기를 보인 뒤 크고 작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지만, 대의를 따랐다는 명분을 쥐고 있으니 공직의 마지막을 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겐 뻔히 보이는 쉬운 답 대신 자충수를 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짐작 가는 첫째 이유는 이들의 상상력 부족이다. 계엄 이후, 항소 포기 후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시각적으로 그려보는 데 실패했다. 1시간과 6시간이 짧아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각각 경제관료와 검사로 수십 년 동안 산전수전 겪은 두 사람은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손에 잡히듯 그려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대명천지에 계엄이 성공해 국회를 멈춰 세울 수 있다는 쪽에 의탁했다는 것이 어이없다. 또 대장동 사건 1심 판결문에 대해 보고받았을 텐데, 김만배 일당의 형사적 금전적 이익에 민심이 얼마나 부글거릴지 짐작 못 했다는 말인가.
또 하나 이유는 공직 DNA다. 주위 평가를 들어보면 둘 다 강단 있는 승부사보다는 기질적으로 순응형 노력파에 가깝다. 공직 사다리를 올라오는 동안 소수 의견을 관철한 경우보다 대세를 모범적으로 따르는 쪽이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어두운 기운이 닥쳤을 때 옳고 그름보다는 유불리를 따졌고, 책임의식보다는 정치적 후각을 예민하게 가동시켰던 것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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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