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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 추석편지 썼어요” 한글 배우고 새 삶 여는 어르신들

입력 | 2025-10-09 01:40:00

‘말모이 문해학교’ 뜨거운 공부열기
“평생 까막눈… 이젠 혼자 은행 다녀”
어르신 10명 중 1명, 읽기-쓰기 못해
“고립된 삶, 세상과 연결을” 목소리



경기 성남시 수정노인종합복지관의 한글 학교인 ‘말모이 문해학교’에서 2일 오후 한 어르신이 교재를 연필로 짚으며 공부하고 있다. 이 교실에선 평균 나이 70세가 넘는 어르신들에게 한글과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친다. 성남=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매일 보아도 물리지 않는 귀여운 딸들, 올해 추석도 한가위만 같아라.”

579돌 한글날을 일주일 앞둔 2일, 조현만 씨(78)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편지를 써 내려갔다. 경기 성남시 수정노인종합복지관의 한글 학교 ‘말모이 문해학교’에서는 이날 추석을 맞아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수업이 열렸다. 어르신들은 책상에 코가 닿을 만큼 고개를 숙인 채 글쓰기에 집중했다. 어려운 글자가 나오면 공책을 뒤적이거나 옆 사람에게 “매느리(며느리)는 어떻게 써?”라고 물었다. 한 어르신은 수십 번 지우개로 고쳐 쓴 끝에 “사랑하는 우리 아들아”라는 문장을 완성했다.

3년 전 ‘늦깎이 학생’으로 입학한 ‘글모음 3반’ 어르신 11명은 현재 초등학교 5, 6학년 과정을 배우고 있다. 올해까지 이수하면 초등학교 학력을 인정받는다. 평균 나이 75세인 이 반의 어르신들은 수업 전날부터 설레서 자다 깨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조 씨는 “평생 까막눈으로 살았는데, 이젠 은행도 혼자 간다”며 “한글은 배우면 배울수록 참 고맙고 아름답다”고 말했다. 이경자 씨(69)는 “한글을 배운 덕분에 처음으로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글로 썼다”며 웃었다. 교사 박순미 씨(66)는 “ㄱ(기역)자 쓰기도 어려워하셨던 분들이 글을 배우며 자신감을 되찾는 모습을 지켜보니 뭉클하다”고 했다.

이처럼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의 지원으로 문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교실은 전국 400여 곳에 이른다. 지난해 새로 한글 공부를 시작한 어르신은 약 2만 명. 올해 8월 문해학교 재학생을 대상으로 열린 ‘제14회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는 1만5528명의 어르신이 출품했다. 키오스크 사용 경험을 시로 표현해 교육부 장관상을 받은 조원호 씨(72)는 “처음엔 어려웠지만, 글을 배워 상도 타니 자식들이 더 좋아한다”며 웃었다. 조 씨는 충남 예산도서관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다.

교육부 ‘성인 문해 능력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중 기본적인 읽기·쓰기를 못 하는 ‘비문해 인구’는 146만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60세 이상이 139만9000명(95.8%)으로 대다수다. 60세 이상 어르신 10명 중 1명은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해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문해 교육이 단순한 배움의 기회를 넘어 고령층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고 강조한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글을 읽고 해독하는 능력이 없으면 지역사회에서 고립되기 쉽다”며 “문해교육은 복지 차원을 넘어 어르신들이 고립감을 벗고 일상의 선택권과 주도권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글을 배우는 것은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일”이라며 “간판을 읽고 은행 업무를 스스로 처리하는 경험이 자신감과 효능감을 회복하게 하고, 뇌 자극을 통해 치매 예방 효과도 크다”고 강조했다.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성남=천종현 기자 pun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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