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태어나 진화하는 언어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인도서 시작된 인도-유럽어 연구
우크라이나 헤르손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 유목민 유골을 바탕으로 복원한 고대 인도-유럽인의 모습. 말과 마차를 사용한 유목인들이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확장해 다른 민족과 섞이는 과정에서 유럽어의 뿌리인 ‘인도-유럽어족’이 기원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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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유럽에서 민족국가가 등장하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비슷한 언어의 사용은 순수한 민족을 찾아낼 주요 단서처럼 여겨졌다. 이를 통해 인도-유럽어족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일부 학자는 인도-유럽어를 ‘우월한 민족의 상징’으로 봤고, 나치 독일은 이를 ‘아리안족’ 신화와 결합해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로 악용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고유전학은 이런 신화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고대 DNA 연구는 인도-유럽어의 확산이 단일 순혈 민족이 아닌 수많은 혼합과 이동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인도-유럽어의 기원은 초원
고고학은 인도-유럽어의 기원에 대한 실마리를 풀었다.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로 활동한 여성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1921∼1994)는 1956년 인도-유럽어를 쓰는 지금의 유럽인이 6000년 전 흑해∼카스피해의 초원에 살던 유목민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쿠르간 가설’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서구 유럽학계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세계적인 선진 문명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서구 유럽인이 러시아 남부의 유목민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콜린 렌프루 같은 영국학계는 유럽인의 기원이 유목민이 아닌 약 7000년 전 아나톨리아 반도의 농경민들이라고 주장했다. 또 인도-유럽어족이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유럽으로 퍼졌다고 했다. 1980, 90년대에 렌프루의 설은 유력한 대안으로 널리 영향력을 발휘했다. 학문적인 논증 이전에 당시 유럽과 소련이 극한으로 대립하던 시기였던 사회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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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한 연구는 수백 구의 고대 인골 DNA를 분석해 유럽인이 약 6000년 전 카프카스-볼가강 하류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이 지역 주민들이 초기 유목문화를 받아들였고, 그중 일부가 아나톨리아(현 튀르키예)로 이동해 초기 인도-유럽어가 확산됐다는 시나리오다. 물론 언어와 유전은 동일하지 않지만, 김부타스의 스텝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고고유전학적 근거로 평가된다.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세운 최초의 제국 히타이트 전차 전투 조각상.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현존 가장 오래된 인도-유럽어 기록인 ‘아니타왕의 문서(아니타 텍스트)’ 일부. 기원전 약 17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동아시아로 확산된 인도-유럽인은 실크로드에 남아 계속 거주했다. 그들은 ‘토하르인’이라 불린다. 이들은 서기 10세기경까지 잔존하며 실크로드에서 교류를 담당했다. 이렇듯 언어는 순수하게 한 줄기로 이어진 것이 아닌 다양한 기술과 문화 교류 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했다.
왜 동북아 언어는 서로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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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볼 수 있다. 외국어를 모르는 어르신들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외래어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최근 경기 분당시 판교 정보기술(IT) 업계 종사자들의 독특한 말투가 일명 ‘판교 사투리’로 불리며 화제가 됐다. 비슷한 원리일 것이다.
근대 이후 인도-유럽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배경에는 서양의 패권 이외에도 표음문자 및 기술과 관련된 단어들이 유사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최근 주요 2개국(G2)으로 자리 잡은 중국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어 사용자는 15억 명에 달하지만 대부분 중국 내에 거주한다. 또한 한자는 중국 외 한국과 일본에서만 사용한다. 중국은 갑골문자에서 이어지는 상형문자를 그대로 발달시킨 역사성을 자랑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입력 효율이 낮다. 그래서 중국인은 메신저를 쓸 때도 대개 한자를 직접 입력하지 않고 메시지를 녹음해 전송하는 식으로 소통한다. 그 결과 중국의 젊은 세대는 펜을 잡아도 글을 쓸 수 없는 상태(提笔忘字·컴퓨터 세대의 신문맹화를 상징하는 중국 표현)를 보이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AI)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이런 상황이 더욱 가속화된다면 향후 몇 세대 안에 사실상 한자 필기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AI 시대, 한국어의 미래 전략
인도-유럽어는 광범위한 어근 공유와 파생 구조, 정보화에 유리한 알파벳의 특성, 그리고 방대한 디지털 자료를 바탕으로 AI 시대에도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한국어 역시 자모 분해·조합 구조와 높은 표기 효율성, 한자 문화권에서 비롯된 어휘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드문 언어다. 최근 K컬처의 확산은 이런 장점을 세계로 퍼뜨리고 있다.
인도-유럽어의 기원 연구는 궁극적으로 언어가 순수한 집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이동·혼혈·기술 교류 속에 만들어짐을 밝혀냈다. 변화와 융합이야말로 언어의 본질이다. 초원을 달린 말과 전차가 언어를 실어날랐듯, 오늘날의 AI와 디지털 네트워크도 언어의 지형을 재편하고 있다. 인도-유럽어의 장구한 여정을 이해하는 일은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한국어의 미래 전략을 세우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줄 것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