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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낙태금지, 州정부가 정해야”… 대선 의식해 공 넘겨

입력 | 2024-04-10 03:00:00

낙태권 입장 회피… 정치적 선택
공화당서도 “동의 못해” 비판론
바이든, 낙태권 이슈화 집중공세




“낙태권은 주(州)에서 각자 결정해야 한다.”

11월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잠정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번 대선 과정에서 처음으로 낙태권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혔으나 안팎에서 거센 반발에 맞닥뜨리고 있다. 미 연방대법원이 2022년 낙태를 사생활의 권리로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1973년)을 뒤집은 뒤 낙태 문제는 올해 대선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런 이슈에 대해 회피성 발언을 내놓자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2000년 첫 대선 도전 때부터 낙태권 폐지에 힘을 실어왔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 여성과 중도층에서 낙태권을 보장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다소 모호한 태도를 취해 왔다. 이번 공식 입장에 대해서 공화당 정치 전략가인 매슈 다우드는 “정치적으로 최악이 될 수 있는(the worst possible) 선택을 했다”고 평했다. 논란을 피하려다 되레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뜻이다.

● ‘뜨거운 감자’ 낙태권 이슈 회피

트럼프 전 대통령은 8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게재한 영상 성명을 통해 처음으로 낙태 이슈를 공식 언급했다. 그는 “주마다 (낙태 금지) 기간이 다르고, 몇몇 주는 다른 주보다 더 보수적이다”라며 “이는 결국 해당 주의 주민들 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이나 산모 생명이 위험한 경우 등은 낙태가 허용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낙태권이 연방정부가 아닌 주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란 뜻이다.

이번 성명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기존 입장과도 거리가 있다. 그는 낙태권 반대가 애초 입장이었다. 대통령 재임 당시 꾸린 보수적 성향의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을 때만 해도 “가장 큰 생명의 승리”라며 환영했다. 지난달 미 폭스뉴스 인터뷰에서는 다소 모호하지만 ‘임신 15주 이후 낙태 금지’를 시사했다.

이런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두고 “원칙보다 정치를 택했다”(뉴욕타임스·NYT)는 평이 많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고 약 5개월 뒤인 그해 11월 중간선거에 연방대법원 판결에 반발한 유권자들이 집권 민주당으로 결집하는 양상을 지켜본 그로선 여성과 중도 유권자의 표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NYT는 “트럼프가 고심 끝에 내놓은 성명은 낙태권 지지 세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분석했다.

● 트럼프, 재판 연기도 거부당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낙태권 입장 발표는 즉각 정치적 요동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대표적 측근으로 알려진 공화당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마저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생명 보호 운동은 지리적 문제가 아닌 태아의 복지에 관한 것”이라고 맞섰다. 이러자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레이엄이 선거에서 이긴 유일한 이유는 내가 지지했기 때문”이라며 맞불을 놓았다.

낙태권 반대 시민단체들도 들고일어났다. 미 최대 반(反)낙태 단체로 꼽히는 ‘수전 B 앤서니 프로라이프 아메리카’의 마저리 대넨펠서 회장은 “매우 실망했다”며 “낙태권 보장법을 제정하려고 끝없이 노력하는 민주당에 국가적 의제를 양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선 경쟁자인 조 바이든 대통령도 가만있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는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구보다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엎은 당사자란 사실을 분명히 했다”고 했다. 그는 낙태권을 연방정부 차원에서 복원하겠다고 내세우고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낙태 이슈는 민주당에 공화당을 이길 몇 안 되는 기회 중 하나”라고 평했다.

한편 뉴욕주 항소법원은 이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추문 입막음’ 형사재판 연기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이달 15일부터 재판이 시작된다. 해당 재판은 지금까지 트럼프 전 대통령이 형사 기소된 4건 가운데 처음으로 대선 이전에 열리게 된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