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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놀랍지도 않은 북의 ‘아시안게임 표변’

입력 | 2023-10-03 23:45:00

필요하면 민족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북한
핵무기 개발은 30년 넘게 변함없이 추구



박용 부국장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보인 북한 선수단의 행동은 201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남북 단일팀의 추억을 갖고 있는 이들에겐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단일팀 유니폼을 입고 함께 땀을 흘렸던 그들이 5년 만에 딴사람이 됐다. 한 팀으로 뛰었던 북 여자농구 선수들은 우리 선수들을 차갑게 외면했다. 사격에서 우리 선수에게 져 은메달에 머문 북 선수들은 시상대에서 함께 사진조차 찍길 꺼렸다. 북 선수단 관계자는 뜬금없이 기자들에게 정식 국호로 불러 달라고 몽니를 부렸다. 그러면서 북 주민들에게 틀어준 중계 영상에선 우리를 ‘괴뢰’라고 불렀다.

북한의 태세 전환은 의도적이니 우리끼리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5년 전 북-미 협상 국면에서 열린 직전 대회의 ‘북한’ 이미지를 지우려는 ‘낯설게 하기’ 선동이며, 국제적 관심이 쏠리는 아시안게임에서 남과 북이 갈라섰다는 걸 강조하고 한반도 긴장 상황을 세계에 주지시키려는 선전 술책이다. 우리에게 ‘북측’이 아닌 정식 국호를 써달라고 요구하는 건 이젠 같은 민족이 아니라 ‘남남’으로 생각하라는 협박성 설정이다. 그들에게 피를 나눈 민족 개념은 김정은 정권이 지배하는 그들의 ‘조국’보다 낮은 하위 개념이며, 선전선동을 위해선 언제든지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전술적 도구일 뿐이다.

같은 민족끼리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 돌이켜보면 그들은 그랬다.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됐던 2017년 뉴욕 특파원에 부임한 뒤 만난 북한 외교관들은 우리 기자들의 간단한 질문에도 입을 열지 않던 얼음장 같은 이들이었다. 2018년 북-미 협상 국면에선 지령이라도 받은 듯이 달라졌다. 먼저 말을 걸고 귀임 날짜나 가족 관계와 같은 사적인 질문도 던졌다. 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우리 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해 와인잔을 기울였다. 북-미 협상이 결렬되자 그들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다. 1년 만에 말도 섞기 싫은 원수처럼 대하다가 살가운 혈육을 만난 것처럼 돌변할 수 있는 게 그들이다.

북한의 변덕스러운 행동 뒤엔 변하지 않는 진심도 있다.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소속 김인철 서기관은 유엔총회장에서 “개는 짖어도 마차는 간다(The dog barks, but the caravan moves on)”며 “위협에 단호히 대응하고 해야 할 일을 계속하겠다”고 발언했다. 핵과 ICBM 개발을 멈추지 않겠다는 위협이었다. ‘개는 짖어도∼’ 표현은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관련한 북-미 협상장에서 북측 대표 강성주가 미 대표인 로버트 갈루치에게 썼던 말인데 핵실험과 ICBM 발사로 북-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인 2017년에도 등장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로켓맨”으로 지칭하며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자, 유엔총회 연설을 위해 뉴욕에 온 리용호 북 외무상은 기자들 앞에 서서 “개들이 짖어도 행렬은 간다는 말이 있다. 개 짖는 소리로 우리를 놀라게 하려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개꿈”이라며 응수했다.

북한이 30년 넘게 ‘개가 짖어도 마차는 간다’며 마이웨이를 고수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준 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한 한미의 대북 정책이었다. 내년 11월 미 대선에서 한미 동맹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해 따지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 가능성이 나오는 상황에서 북한이 러시아와 밀착하며 2017년 한반도 긴장 상태로 시곗바늘을 되돌리려는 건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가을이 오면 표범의 털이 아름답게 변해 ‘표변(豹變)’이라고 하는데, 필요하면 민족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북의 표변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