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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손기정 연설 장면만 두 달 연습했어요”

입력 | 2023-09-27 10:54:00

영화 '1947 보스톤'서 마라토너 손기정 역
베를린올림픽 시상 장면 연기 "너무 부담"
"촬영 시작하자 몸이 굳는 것 같은 느낌"
"연설 장면 가장 중요…수도 없이 연습해"
"최근 흥행 실패 아프지만 전진해야 돼"




배우 하정우(45)의 연기엔 어려운 게 없어 보인다. 어떤 영화에 나와도 그는 자연스럽다. 여유가 있고, 리듬이 있다. 그가 편한 연기를 했다는 게 아니다. 최근 10년 간 하정우만큼 다양한 역할을 맡아 각종 고생을 한 배우도 드물 것이다. 다만 그는 어떤 연기를 하든 마음을 최대한 침착하게 유지해내는 것만 같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화 안에서 그렇게 매끄럽게 움직일 순 없다. 그런 그가 “촬영을 시작하자 몸이 굳는 것 같았다”고 했다. “매우 매우 부담스러웠다”고도 말했다. 그가 연기한 인물이 손기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정우가 영화 ‘1947 보스톤’으로 돌아왔다. 이 영화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자인 서윤복, 그리고 이 두 사람과 함께했던 또 다른 마라토너 남승룡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베를린올림픽 10년 뒤 삶에 의욕을 잃은 손기정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마라토너 서윤복을 만나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세계 무대에 서는 걸 다시 꿈꾸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1947 보스톤’은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시상대에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당시 그는 금메달을 땄는데도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부상(副賞)으로 받은 월계수 화분으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가렸다. 이 장면은 애국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 사회에 수도 없이 회자됐고, 나중엔 교과서에도 실렸다. 손기정은 한 마디로 국민영웅이었다. 하정우는 바로 이 역사적인 장면을 직접 연기하면서 몸이 굳는 걸 느꼈다고 했다.

“시나리오로 볼 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까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이 국민영웅을 내가 연기할 자격이 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부터 이 분을 연기 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습니다. 배우 하정우가 가진 면모를 손기정이라는 인물에 투영하는 것 역시도 안 될 것 같았어요. 제가 의지했던 건 감독님, 그리고 손기정 재단 통해서 받은 각종 자료였죠. 최대한 진짜 손기정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손기정은 잃었던 삶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끌어올리는 인물. 다만 그에겐 여전히 울분이 남아 있다. 손기정에겐 나라를 잃은 슬픔은 물론이고 시상대에서 일장기를 가렸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사실상 강제 은퇴를 당한 아픔도 있었다. 영화에 담기진 않았지만, 개인적인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손기정을 불 같은 인물로 그려낸다. 속은 따뜻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땐 거침이 없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정우는 이런 손기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북 출신인 큰아버지를 떠올렸다고 했다. 손기정은 신의주가 고향이다.

“재단에서 보내준 각종 자료 같은 건 당연히 다 읽고 공부했습니다. 손기정 선생님 관련 일화도 웬만한 건 다 들었고요. 다만 선생님을 직접 만나뵐 순 없으니까, 저희 큰아버지를 생각했어요. 큰아버지가 이북 분이었거든요. 두 분이 성격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 그런데 손기정 선생님의 성격을 제가 얘기하는 것 자체도 매우 매우 조심스러워요. 아무튼 큰아버지를 떠올린 게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1947년에 열린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손기정은 감독으로 갔다. 선수는 서윤복과 남승룡이었다. 남승룡은 선수 겸 코치를 맡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미국에서 손기정 일행은 다시 한 번 좌절한다. 대한민국이 난민국이기 때문에 태극기가 아닌 미국 성조기를 달고 뛰어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것. ‘1947 보스톤’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손기정이 해외 언론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어 왜 우리가 태극기를 달고 뛰어야 하는지 연설하는 시퀀스를 넣었다. 하정우는 “이 장면이 손기정 연기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손기정의 클라이맥스, 관객이 손기정을 보면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이 바로 그 시퀀스이기 때문에 그 연설 장면을 수도 없이 연습했다”고 했다.

하정우는 연설 장면만 약 두 달 간 연습했다고 했다. “손기정의 가장 중요한 임무잖아요. 제가 그 대사를 할 때 정말 아주 작은 주저함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거침 없이 말이 쏟아져 나와서 그때 그 감정이 관객에게 가닿는 걸 원했습니다. 대사를 외우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보고 또 봐서 툭 치면 줄줄줄 나오게 만드는 거죠. 시간 날 때마다 대사를 봤어요. 스마트폰으로 그 대사를 사진 찍어놓고 시간만 있으면 본 겁니다. 일단 대사가 완벽하게 숙지된 후에 대사에 감정을 담고 리듬을 만들어 갔습니다.”

‘1947 보스톤’은 하정우에겐 중요한 영화다. 지난 여름 방학 성수기 때 선보인 작품인 ‘비공식작전’(105만명)이 흥행 참패했고, 약 두 달 만에 추석 연휴를 앞두고 선보이는 신작이기 때문이다. 만약 ‘1947 보스톤’마저 관객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되면 하정우에게 있는 흥행 배우 이미지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정우는 “흥행이라는 것, 스코어라는 것이 현재 상황에서 가장 핫한 부분이지만 말을 아껴야 하는 것이기도 해서 뭐라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1947 보스톤’이 의미와 재미를 모두 잡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아직 ‘비공식작전’이 준 충격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 됐어요.(웃음) 이 영화가 왜 관객 마음을 얻지 못했는지는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글쎄요, 아파하고만 있을 순 없죠. 아파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