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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정연욱]민주화운동 서사를 희화화하지 말라

입력 | 2023-08-18 23:48:00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철 지난 프레임
정의를 독점한다는 오만한 행태 버려야



정연욱 논설위원


쌍방울그룹 관련 각종 의혹으로 기소된 이화영 전 경기 부지사의 재판에선 보기 드문 황당한 장면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 전 부지사의 변호인들이 당사자와 상의도 없이 불출석한 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이 전 지사의 아내가 변호인 해임신고서를 내고, 이 전 부지사는 “내 의사가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이 전 부지사가 동의하지 않은 변호인이 재판정에 나와 재판부 기피 신청을 했지만 이 전 부지사는 이를 거부하는 일도 벌어졌다. 법조계 인사들이 “역대 법정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동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쌍방울 대북송금 연루 의혹을 부인해 오던 이 전 부지사가 이를 일부 인정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꾼 것이 법정 파행의 도화선이 됐다. 법정 진술로 이어지면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커질 거라는 우려가 제기되자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이 이 전 부지사 아내와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다. 예정에 없던 민변 출신 변호인이 등장하고, 친야 성향의 민주 진영 원로가 방청석에서 묵시적 응원에 나선 것도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정권에 맞서겠다”고 한 이 대표를 살리기 위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했다는 의심이 드는 정황들이다.

이런 장면들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의 일환이었던 법정 투쟁을 연상케 한다. 엄혹했던 그 시절 법정 투쟁은 정권의 무리한 수사와 폭정을 대외적으로 폭로해서 공론화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정권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검찰이나 법원은 민주화 운동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도덕적 자신감의 발로였다. 이 대표의 거취가 걸린 이 전 부지사 공판도 민주 진영의 집단 대응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36년이 지났다. 그동안 정치권의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민주 진영도 다양한 정치 세력으로 분화됐다. 보수-진보 정권교체로 민주화 적통을 자처하는 세력도 세 차례나 집권해 국정을 운영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세상을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기댄 선악(善惡) 프레임으로 바라본다면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퇴행적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딸 조민 씨가 입시비리 혐의로 기소되자 SNS에 “차라리 옛날처럼 나를 남산이나 남영동에 끌고 가서 고문하길 바란다”라고 썼다. 반민주의 상징으로 과거 정치공작의 대명사였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있던 남산,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있던 남영동을 떠올린 것이다. 반면에 자신은 핍박받는 약자로 자리매김했다. 아무리 검찰의 기소 결정이 불만스럽다고 해도 남산과 남영동의 철 지난 악행에 빗댈 일인가. 국민들의 공분을 산 자녀 입시비리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여전히 뒷전이다. 민주 진영의 강성 지지자들에게 호소하는 여론전일 뿐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이끈 세력의 선도적인 투쟁과 헌신은 폄훼해선 안 될 일이다. 이들이 민주화의 새 지평을 연 선구자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민주화는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했을 때 비로소 완성됐다. 그것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공 방정식이었다. 민주화가 특정 진영, 특정 세력이 독점하는 전유물일 수 없는 이유다. 더욱이 민주화라는 방패 뒤에서 이뤄지는 행위라면 모두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만한 행태는 한층 높아진 국민 눈높이에 부응할 수 없다. 민주화라는 찬연한 서사가 더 이상 진영 논리로 왜곡되거나 희화화되어선 안 될 것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