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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 매개로 성공적인 공동체 일궈낸 ‘쌀밥의 힘’[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입력 | 2023-05-12 03:00:00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따뜻한 밥 한 공기만큼 우리의 마음을 달래는 음식이 또 있을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일생과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쌀밥은 언제부터 우리와 함께했을까. 원래 벼는 아열대의 식물로 한국 토착의 곡물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 조금씩 우리와 함께하던 쌀은 3000년 전 우리의 선조가 논농사를 짓고 고인돌을 만들면서 우리의 주식이 되었고 후에 일본으로도 전해졌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아열대의 곡식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을까. 우리의 선조들의 위대한 시도로 태어난 쌀밥의 시작을 알아보자.》



우리가 기름진 쌀을 좋아하는 이유

벼는 크게 인디카와 자포니카로 나뉜다. 인디카 쌀은 동남아 지역에서 주식으로 하는데 찰기가 없고 길죽하다. 반면에 자포니카 쌀은 우리가 흔히 먹는 찰기가 있고 동글한 쌀이다.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부슬부슬 날아가는 인디카 쌀을 더 선호한다. 그리고 한국의 남해안 일대와 일본 열도에서도 야생에서는 인디카 계통의 벼가 자랄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사람들만 특이하게 윤기가 흐르는 찰진 쌀만을 좋아하는데, 사실 그 배경에는 수천 년의 역사가 숨어 있다.

야생의 벼는 대체로 빙하기가 끝난 직후인 1만 년쯤 전에 중국 남부 양쯔강 유역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7000년 전부터 논농사가 시작되면서 쌀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재배종으로 바뀌는데, 이때부터 자포니카 종이 선택되었다. 최초의 논이 양쯔강 유역에서 등장한 이유는 그 지역의 지리 환경과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은 갈대로 덮인 강가 근처의 소택지가 많이 발달했다. 이런 소택지에서 다른 곡식은 재배하기 어렵지만 쌀은 예외였다. 볍씨는 오히려 소택지에서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아도 잘 자랐다. 양쯔강 유역에서 만들어진 최초 논의 수확량을 추산한 결과 1ha에 900kg 정도로 지금 한국 논에 비하면 7분의 1 정도 수준이었다. 이렇게 쌀을 물속에서 키우면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잘 자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후 논농사는 산둥반도와 만주 일대로 확산되었다.

한편, 중국 근처에 있는 한국의 경우 청주 소로리에서 나온 볍씨를 들어서 구석기시대인 1만5000년 전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관련 증거가 부족하다. 또한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에서도 여러 곡물과 함께 볍씨가 종종 발견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쌀농사를 짓는 지금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나라에 논농사가 본격적으로 전해진 때는 약 3000년 전으로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를 거쳐서 벼농사가 남한 일대로 널리 확산되면서다. 쌀만 내려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도 만주에서 전해졌다. 청동기, 고인돌 등 새로운 문화가 논농사와 함께 들어오면서 한반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아열대가 아닌 한국에서 쌀이 잘 자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교적 추운 중국 북방지역을 거치면서 천천히 온대지역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품종으로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전해진 쌀이 지금도 우리가 좋아하는 찰기가 흐르는 자포니카종이다.



3000년 이어온 쌀밥의 역사

아열대 곡식이었던 쌀은 약 3000년 전 남한 일대로 퍼지면서 한국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마전리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논 유적. 우물 2기와 함께 저지대 구릉에서는 물을 인공적으로 막기 위한 보와 물웅덩이 등이 발견됐다. 고려대 고고환경연구소·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남한으로 들어온 쌀농사가 우리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지역은 3000년 전 금강과 호남의 너른 평야가 있는 지역이다. 고고학자는 이 최초의 쌀농사꾼을 송국리문화라고 부른다. 이때를 기점으로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있는 너른 평야가 펼쳐진 소위 ‘배산임수’ 땅에는 어김없이 수백 개의 집으로 이루어진 마을들이 들어섰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땅과 환경에 대한 인식은 이때에 이미 싹튼 셈이다. 송국리문화의 사람들은 평야에는 논을 만들었고 뒷동산에는 고인돌을 만들어 마을의 어른을 모셨다. 지금 전라남도에만 2만 개 가깝게 남아 있는 고인돌은 바로 논농사를 지었던 우리 선조들이 ‘밥심’으로 힘을 합쳐서 돌을 날라 세운 것이다. 이때 사람들이 얼마나 논농사에 진심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가 있으니, 바로 바닷가에 조개무지가 사라졌다. 심지어 다도해나 신안 같은 섬에서도 농사를 짓고 고인돌을 만들 정도였다. 나중에 송국리문화의 쌀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경상남도 지역까지도 진출했다.

전남 영암군 너른 들판에 만들어진 고인돌. 농경시대 사람들은 힘을 모아 고인돌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며 풍년을 기원했다. 강인욱 교수 제공

이렇게 옛 한국 사람들이 쌀농사에 진심이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한국이 벼농사에 이상적인 기후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모작이 가능하고 강우량이 풍부한 중국 남부나 동남아시아와 달리 한국은 상대적으로 가뭄이나 냉해 같은 피해를 입기 십상이다. 그리고 농사의 실패는 곧바로 공동체의 전멸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그 핸디캡을 다양한 제사와 공동체 생활로 극복했다. 대량의 물을 대는 관개수로를 함께 만들었고 갈등을 극복하고 협력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주식을 쌀로 하면서 생기는 문제도 있었다. 송국리문화 이전에 한국 사람들은 해산물과 다양한 잡곡을 먹었다. 하지만 쌀농사를 지으면서 주식은 쌀로 바뀌었고, 해산물 대신에 육상의 산물로 바뀌었다. 쌀농사에 집중하면서 식성마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렇듯 논을 만들고 쌀을 도입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사회로 거듭나는 진통이 동반된다. 고인돌을 만들고 다양한 잔치와 제사를 벌이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극복했다.

청동기시대 제사 문화를 담은 ‘농경문청동기’(보물 제1823호). 벌거벗은 채 밭을 가는 남자와 솟대, 그리고 술 단지가 묘사돼 있다. 고려대 고고환경연구소·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농사와 함께 시작된 우리의 제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농경문청동기’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작은 청동판을 보면 앞쪽에는 벌거벗은 채로 밭을 가는 사람들이 있고 뒤편에는 나무 위에 새가 앉아 있는 솟대가 그려져 있다. 밭 가는 사람의 옆에는 술을 담은 단지가 놓여 있다. 이 토기에는 아마 쌀을 으깨서 발효시킨 탁한 막걸리 같은 것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고인돌을 발굴하면 주변에 깨진 그릇들이 많이 나온다. 바로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음복을 한 증거이니, 지금 우리의 제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3000년 전에 처음 만들어진 논은 그 이후로 1500년이 지난 삼국시대까지도 중단 없이 계속 만들어졌고 벼도 안정적으로 재배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청동기시대 논바닥과 수로에서 발굴된 나무로 만든 농사기구는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의 것과도 거의 차이가 없다. 3000년을 이어온 놀라운 쌀밥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 규슈 지역을 거쳐서 일본 열도의 문화를 바꾸는 야요이 문화를 태생시켰다.




韓에서 성공한 쌀농사, 日에 전해져

쌀밥이야말로 북방과 남방의 문화가 절묘하게 조합된 결과물이다. 아열대에서 기원한 쌀이 북만주 지역의 발달된 문화와 결합해 기름진 땅의 남도지방으로 내려와서 한국만의 쌀문화로 꽃피었기 때문이다. 음식에서 자기가 원산지이고 기원지임을 고집하는 것만큼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 한국의 쌀이 가치 있는 이유는 기원지라서가 아니다. 벼농사를 매개로 한국이 성공적인 농경 공동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성공한 쌀농사의 문화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의 기원을 이루었으니, 3000년 전 한국인의 과감한 선택이 동아시아 역사를 바꾼 것이다. 진정한 한국의 탄생은 따뜻한 밥 한 공기에서 시작된 셈이니, 밥 한 그릇에 수천 년 우리의 역사가 녹아 있다는 이야기는 결코 문학적 서사가 아니라 고고학이 전하는 사실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