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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중현]마약만큼 끊기 힘든 포퓰리즘의 유혹

입력 | 2023-04-12 21:30:00

정치인만 남는 장사, 선심성 퍼주기
포퓰리즘 중독은 벗어나기 어려워



박중현 논설위원


처음엔 ‘재미 한번 보자’는 식으로 시작한다. 일단 발을 들이면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덜 독하고 부담이 적은 쪽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더 유해하고 파탄에 이르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의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들을 통해 누군가 이득을 챙기는 구조가 굳어지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 포퓰리즘은 이렇게 마약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래서 정치인이 국민 세금을 멋대로 퍼주는 인기영합주의 정책을 ‘정치적 마약’이라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마약 청정국이었다. 지금은 생활 속 깊숙이 마약이 침투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 학원가에서 마약 탄 음료를 학생들에게 먹이는 범죄가 벌어졌다. 유명인이 마약하다 걸린 뉴스에도 “그럴 것 같았어”라는 심드렁한 반응이 나올 정도로 익숙해졌다. 10만 명당 마약사범이 20명 미만인 청정국 지위를 한국은 2016년 잃었다.

한국의 중앙 정치무대에 퍼주기 포퓰리즘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10년 남짓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맞붙은 2012년 대선이 시발점이다.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월 20만 원을 약속한 박 후보는 기초연금을 5년에 걸쳐 2배(9만→18만 원)로 올리자는 문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임기 첫해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한 마음”이라며 대상을 소득하위 70%로 축소했지만 정치적 이득은 톡톡히 챙겼다.

그때 일을 문재인 대통령은 단단히 기억해 뒀던 모양이다. 21대 총선을 하루 앞둔 2020년 4월 14일 그는 헌정사상 첫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했다. ‘고무신 선거’의 부활이란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전 국민에게 지급하자”고 먼저 제안한 건 야당인 미래통합당 쪽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승을 거뒀고,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이 전 국민에게 지급됐다. ‘오랜만에 한우 맛을 봤다’는 반응에 문 대통령은 “가슴이 뭉클하다”고 했다.

작년 3월 대선은 한국 포퓰리즘사의 신기원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실행에 수백조 원이 드는 ‘기본 시리즈’를 앞세웠다. 이행 불가능한 공약이란 지적이 나와도 그는 “앞으로도 그냥 포퓰리즘을 하겠다”고 했다. 포퓰리스트라는 낙인이 정치인에게 불명예가 아닌 시대가 열렸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질세라 ‘병사 월급 200만 원’으로 응수했고, 선거 막바지엔 ‘50조 원 자영업자 손실보상’ 공약을 내놨다.

총선을 1년 앞두고 다시 포퓰리즘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정부가 보증을 서서 전 국민에게 최대 1000만 원을 최장 20년간 낮은 이자로 빌려주는 ‘기본대출’ 카드를 꺼냈다. 대출 원금에만 수백조 원이 들고, 나중에 갚지 않는 돈을 얼마나 세금으로 메워 넣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정책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모든 정책을 당정이 협의하라”고 내각에 지시한 후 여당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지지율을 의식한 전기·가스요금 동결이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광주 군공항 이전 특별법, 대구·경북 신공항 건설 특별법도 여야는 주고받기식으로 통과시킬 계획이다.

한국에서도 포퓰리즘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박재완 장관이 이끌던 기획재정부는 ‘박근혜·문재인 대선캠프 복지공약 이행에 최소 268조 원이 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여야의 반발, 선거관리위원회의 반대로 포퓰리즘의 싹을 도려내는 데 실패했다. 그 후 10여 년간 포퓰리즘은 한국 정치판에 뿌리를 내렸다. 포퓰리즘에 깊이 중독됐다가 빠져나온 나라는 세계적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을 ‘포퓰리즘 청정국’으로 돌이키려면 온 국민이 포퓰리즘 정치와 한판 전쟁이라도 치러야 하는 걸까.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