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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화-의견수렴 없이 만 5세 초등입학 추진”… 학부모-교육단체 반발

입력 | 2022-08-01 03:00:00

[‘만 5세 입학’ 논란]
13개 단체 오늘 용산서 시위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지난 7월 29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진행한 부처 업무보고 결과 브리핑 전 머리를 넘기고 있다. 2022.07.29.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교육부의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추진’ 방침에 대한 교육계와 학부모들의 반대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학교 현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공론화나 의견 수렴 없이 불쑥 던져 놓은 방식에 대해 ‘아마추어 행정’이라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앞서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업무보고를 통해 현행 만 6세인 초등학교 취학 연령을 2025년부터 4년간 단계적으로 만 5세로 낮추는 내용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는 윤 대통령의 대선 후보 당시 공약이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단계에서 발표한 국정과제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사안이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는 “느닷없는 소리”라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사립유치원연합회 등은 교육부가 사전 논의나 정책 연구도 없이 부적절한 정책을 내놨다며 일제히 비판했다.

교육 관련 단체들은 “유아의 발달 단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라며 집단행동을 예고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한국유아교육학회 등 13개 단체는 1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초등학교 취학 연령 하향에 반대하는 시위를 연다.

학부모들의 반발도 크다. 초등학교 취학이 빨라지면 육아 부담이 더 커진다는 이유에서다. 초등학교 취학 연령이 낮아지면 유아 대상 사교육이 더 성행할 거라고 걱정하는 학부모도 많다. 특히 초등학교 취학 연령이 만 6세에서 만 5세로 전환되는 2025∼2028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2018∼2022년생이 대학 입학과 취업 등에서 불이익을 겪을 것이라는 불만도 커지고 있다.




교육계 “만 5세 입학, 유아발달 고려 안해… 사교육 시점만 당길것”


학부모-교육단체 반발



학부모 “긴 수업시간 적응 등 무리”
“초등 1학년 점심도 먹기전 끝나 워킹맘들 직장 그만 둬야” 우려도
교육계 “밀실서 급조한 탁상행정”… 교육부, 교육 격차 해소 위해 추진
교육장관 “학부모 등 의견 수렴”




교육부는 취학 연령을 한 해 낮추는 이유로 교육 격차 해소를 들었다. 사회적 약자 계층이 빨리 공교육 체계에 들어오게 해 출발선상에서의 격차가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정부가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졸속으로 추진한다는 비판 여론이 크다.
○ “유아 발달 단계 고려 안 해”

교육계가 취학 연령 조정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만 6세를 대상으로 한 현재 초등학교 1학년 교육과정이 만 5세에 맞다는 점이다. 만 5세는 추상적 사고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한글 쓰기, 숫자 읽기 등이 어려울 수 있다. 전국국공립유치원교사노조는 “만 5세는 15∼20분의 활동 시간이 지나면 집중력을 잃는다”며 “40분 동안 교실에 앉아 학습하는 게 가능하겠냐”고 꼬집었다. 초등생 자녀를 키워 본 부모들 사이에서도 “만 6세에 학교에 보내도 긴 수업 시간에 적응하거나 혼자 화장실에 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 만 5세는 무리”라는 반응이 많다.

반면 만 5세 취학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만 5세가 되면 ‘학습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인 유아기 기억상실이 만 3∼4세에 끝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아를 대상으로 한 사교육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의무교육이 시작되는 시점을 자녀가 본격적으로 학습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로 생각하는 학부모가 많기 때문이다. 또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이나 덧셈 등을 가르쳐서 보내는 부모들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이런 유형의 사교육을 시작하는 시기를 더 앞당길 거란 우려도 나온다.
○ “맞벌이 가정 육아 부담 가중”
‘국가가 만 5세 교육을 책임지겠다’는 교육부의 주장과 달리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초등학교 취학이 빨라지면 오히려 육아 부담이 커진다고 호소한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희망 학생에게 전일제 돌봄을 제공하는 반면에 초등학교는 돌봄교실 신청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2021년 9월생 딸을 키우는 워킹맘 김모 씨는 “직장 어린이집은 퇴근할 때까지 아이를 맡겼다가 데리고 올 수 있지만 초등학교 1학년은 점심도 먹기 전에 끝나지 않느냐”면서 “만 5세 아이를 학원으로 돌릴 수도 없어 아이가 입학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학부모들은 벌써부터 입학 연기 제도를 통한 만 6세 취학을 고려하고 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경제적 여유와 교육에 대한 관심이 있는 계층은 입학 연기를 활용해 1학년 준비를 한 뒤 학교에 들어갈 것”이라며 “초등 1학년 때부터 계층 간 차이가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교육계 “합의 없는 밀실 정책”
교육부의 이번 발표가 반발을 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사전 준비나 현장과의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후보 당시 영·유아 대상 공약에는 만 5세 담당 누리과정 유아교육·보육 교사의 초등교육 연계 전문성을 강화하고, 대상 아동에게 초등학교 취학 통지서에 준하는 안내를 하겠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만 5세 취학과 충돌하는 내용이다.

전국사립유치원연합회는 지난달 30일 입장문을 내고 “의견 수렴과 연구 과정 없이 백년지대계라는 교육 정책을 발표했다”며 “윤 대통령이 이런 공약을 후보 시절에 했더라면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학교 교육 현장을 전혀 모르고 내놓은 탁상행정의 표본”이라며 “밀실에서 급조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박 부총리는 지난달 29일 업무보고 백브리핑에서 “(정책 추진이) 시작되면 교육청, 관련 단체, 학부모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말했다.




YS-노무현도 ‘만 5세 입학’ 추진하다 무산


역대 정부 ‘만 5세’ 취학 추진 사례

이명박, 실효성 없다고 결론 내
박근혜-문재인 정부도 제안은 계속




초등학교 취학 연령은 1949년 교육법에 ‘만 6세’로 명시된 이후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취학 연령을 만 5세로 앞당기는 방안은 여러 정부에서 시도돼 왔지만 실현된 적이 없다. 그만큼 간단치 않은 문제라는 의미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은 교육개혁안에 국민학교 취학 연령을 만 6세에서 만 5세로 내리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전체 아동을 대상으로 취학 연령을 앞당기는 것은 실현되지 못하고, 1995년 12월 만 5세에게도 취학을 허용하는 내용의 교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만 5세 초등학교 입학’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 다시 추진됐다. 2007년 정부는 ‘비전 2030 인적자원 활용전략’을 통해 취학 연령을 만 5세로 낮추고, 3월 학기제를 9월 학기제로 개편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여당인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도 비판 의견이 나오면서 무산됐다. 한국교육개발원도 효과보다 혼란이 더 크다는 취지의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2009년 이명박 정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에서는 저출산 대책으로 초등학교 취학 연령을 앞당기겠다고 했다. 이에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가 조기 취학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검토한 결과 실효성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 교과부는 2011년 만 5세 대상 유치원의 교육과정과 어린이집의 보육과정을 통합한 ‘누리과정’을 대안으로 내놨다.

누리과정 도입으로 일단락된 듯 보였던 ‘초등학교 만 5세 입학’은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도 계속 제안됐다. 2015년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저출산·고령화 대책으로 초등학교 취학 연령 하향을 제시했다. 2019년 국가교육회의도 취학 연령을 앞당기자는 제안을 했으나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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