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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성 디자인에 반기, ‘멤피스’의 유쾌한 실험[임형남·노은주의 혁신을 짓다]

입력 | 2022-07-05 03:00:00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제품 디자이너인 멘디니가 1994년 디자인한 와인병 따개 ‘안나G’(위 사진). 이탈리아 산업디자인의 르네상스를 이끈 스위스 태생 건축가 겸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가 1969년 디자인한 타자기 ‘밸런타인’. 사진 출처 archiexpo·위키피디아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안나G’는 와인병 코르크 뚜껑을 빼내는 도구이다. 단발머리에 목이 길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모습인데, 얌전하고 다소곳하게 서 있다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접었다 하면서 코르크를 빼낸다. 그 모습이 무척 익살스럽고 귀엽다. 알레시라는 이탈리아의 디자인 브랜드에서 한정 출시했던 ‘안나G’는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고 아직까지도 많이 팔린다.

이 제품을 디자인한 사람은 알레산드로 멘디니라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제품 디자이너이다. 화려하고 익살맞으며 감각적인 그의 디자인은 우리나라 전통 민화나 조각보 디자인처럼 다양한 색들이 과감하게 섞여 있다. 색뿐 아니라 비례나 재료의 연결도 무척 과감하다. 그는 ‘카사벨라’ ‘모도’ ‘도무스’ 등 예술잡지의 편집에도 참여하며 이탈리아와 포스트모던, 급진적 디자인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 산업혁명의 여파와 여러 가지 기술의 발달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모든 것을 양산할 수 있게 됐다. 인류의 오랜 꿈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감으로 아트 앤드 크래프트 운동이 일어난다. 공예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모리스는 다시 수공예로 돌아가자며 생산의 거룩함과 엄숙함이 배제되는 노동에 반기를 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의 디자인 운동은 대립적 구도를 반복했다. 20세기 초 딱딱하고 직선적이며 단순하고 절제된 모더니즘의 시대가 지나며 부드러운 곡선과 다양한 색상이 복합된 형태의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이 부각됐다. 마치 요즘 인테리어에서 화려한 조명과 강렬한 색상의 가전제품, 그리고 곡선형 인테리어가 유행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알록달록하고 동화적이며 이야기를 건네는 듯한 모양. 단순한 요소의 반복적 나열과 어울리지 않는 색상과 모양의 충돌. 역사적 양식의 차용과 소비적인 장식의 남용. 그래서 오히려 페이소스가 스며들도록 하는 전략은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다.

1980년대에 건축과 제품 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한 ‘멤피스 그룹’은 기능주의적 디자인에 반대하며 친근하고 유쾌한 디자인을 표방했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인 알레산드로 멘디니, 필리프 스타르크, 쿠프 히멜블라우가 설계한 3개의 파빌리온으로 구성된 네덜란드의 흐로닝어르 박물관. 현대적인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의 정체성을 건축물에도 투영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는 바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980년대에 활동했던 ‘멤피스 그룹’의 작업 경향이다. 멤피스 그룹은 건축가 에토레 소트사스가 1981년 디자인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탈리아 밀라노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젊은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멤버로 모여 디자인 운동을 벌였다.

소트사스는 세라믹, 회화, 조각, 가구, 사진, 보석,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사무용 장비를 설계하면서 사무기기를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가 1969년 발표한 타자기 ‘밸런타인’은 20세기 디자인의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멤피스라는 이름은 고대 이집트 도시나 엘비스 프레슬리가 활동했던 미국 도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룹 멤버들이 첫 모임을 가졌던 1980년 12월 11일 저녁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밥 딜런의 ‘Stuck Inside of Mobile with the Memphis Blues Again(자동차 안에 갇혀 멤피스 블루스를 다시 듣다)’라는 노래에서 본떴다. 1917년생인 소트사스는 멤피스 그룹을 만들 무렵 60대로 젊은 치기를 부릴 연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멤피스 그룹의 향후 행보가 느껴지는 작명임은 분명하다.

이들은 미국의 도시이자 고대 이집트의 수도를 상징하는 ‘멤피스’라는 이름이 지닌 애매성을 활용해 모호한 디자인 철학을 표현하고 상징화했다. 특히 소트사스의 경우 중산층의 취향, 제3세계와 동양의 전통, 때 묻지 않은 자연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근거나 일관성, 비례에 대한 존중 없이 감각적으로 즐겁게 만드는 멤피스 그룹의 작업은 기능성과 효율을 중시했던 현대 디자인에 대한 반항처럼 보인다. 이들은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의 회복을 추구하며 가벼운 느낌의 코팅 플라스틱과 테라초 같은 재료를 주로 사용했다.

비록 이들 그룹은 1987년에 해체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대두된 포스트모더니즘과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후 마이클 그레이브스, 한스 홀라인, 이소자키 아라타 등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들은 과거의 인용으로 가득한 화려하고 다소 소란스러운 건축물들을 설계한다.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네덜란드 흐로닝어르 박물관은 멘디니와 필리프 스타르크, 쿠프 히멜블라우가 디자인한 3개의 주요 파빌리온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란 사각형 매스(덩어리)와 저층부 사다리꼴 매스의 내부와 외부를 멘디니가 설계했다. 외관에는 프랑스 점묘 화가 폴 시냐크의 작품을 모티브로 반복된 문양을 프린트했는데, 시각예술을 인테리어에 담아낸 셈이다. 그 위로 이어지는 2개 층의 들쑥날쑥한 강판과 유리로 된 해체주의 성향의 매스는 쿠프 히멜블라우가 설계했다. 도자기 컬렉션이 있는 원형의 매스는 스타르크의 작품이다.

전시 컬렉션의 종류를 외부에서도 그대로 인식하도록 설계한 기묘한 형태의 이 건물은 다양한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멤피스 그룹의 디자인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극한의 대립을 보였던 정치 이념이 희석되기 시작한 20세기 말의 분위기를 보여주듯, 자유롭고 다양하면서 경쾌한 모습도 담고 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