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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보물과도 같은 사진집 ‘심마니’[안드레스 솔라노 한국 블로그]

입력 | 2022-02-18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소설가


생각건대, 한국이 진짜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 번째, 피자와 함께 먹는 피클과 치킨에 딸려 오는 절임무의 포장을 뜯었을 때 국물이 새지 않는 뚜껑을 디자인할 것. 두 번째가 진짜 중요한데, 출판사들이 사진집의 미적 가치를 이해하고 독자들이 진지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다운 예술 서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짧은 기도를 올린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음악을 틀거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나는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며 사진집을 한 권 골라 그 속에 든 작품들을 천천히 넘겨본다. 이것이 내가 세상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사진집의 판형과 디자인과 종이의 종류와 작품의 인쇄 상태와 표지의 질감까지도 무척 중요하게 여겨진다.

얼마 전 내 생일에 사진집을 선물 받았다. 일본에 살며 작품 활동을 하는 사진작가 양승우의 책이었다. 이 사진집은 도쿄에 남은 마지막 카바레가 문을 닫던 날을 찍은 것인데 공간의 주인과 친구였던 작가는 그의 허락을 받아 마지막 밤의 많은 순간을 가감 없이 사진에 담았다. 선물을 준 지인은 온라인에서 책을 주문하여 나에게 바로 배송되도록 했는데, 물건을 받고서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사진에 비해 출판 상태가 너무도 무성의했기 때문이다. 책은 받았지만 펴볼 마음이 사라졌다. 양승우 작가의 작품은 이보다 훨씬 더 멋진 출판사에서 출간돼야 했다. 예를 들어 이안북스 같은 곳 말이다. 나는 이안북스의 책들을 통해 훌륭한 한국의 사진가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이정진의 사진 에세이북 ‘심마니’이다.

1987년 1월,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사진작가 이정진은 울릉도를 찾아간다. 한겨울에 걷고 또 걷다가 다다른 알봉 분지의 설원에 투막집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집 쪽으로 다가갔을 때 군불을 때는 한 여자를 보았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가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날, 그곳에 묵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각각 일흔여덟, 일흔네 살인 이 노부부는 세 마리의 염소와 한 마리의 고양이와 세 마리의 소와 함께 살고 있었다. 전기는 없었고 그나마 신식인 물건은 건전지로 작동하는 라디오뿐이었다. 이 라디오를 통해서 바깥 소식이나 일기예보를 듣곤 했다. 원래 이들은 경북 상주에서 살았는데 1970년대 말 남자가 산삼을 캐기 위해 울릉도로 들어왔다. 얼마 후엔 아내도 입도해 알봉에 집을 짓고 함께 살고 있었다.

이정진 작가가 기억하기에 첫날 부부의 삶이 무척 편안해 보였고 이것이 바로 자연과 가장 가까운 삶의 모습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1년 동안 울릉도를 드나들며 이 부부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산삼을 찾으러 다니는 남자를 따라 산을 돌아다녔고, 투막집에서 여자와 함께 옥수수를 까기도 했다. 봄에는 서울을 방문한 부부를 따라다녔다. 서울 여행에서 사진 속 남자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서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다.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외로운 모습이다. 마치 속세의 인간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모습 같은데, 그의 표정은 호기심보다는 동정심에 가깝다.

1987년 12월, 심마니와 그의 아내는 울릉도를 떠난다. 그들이 살던 알봉 분지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지난 9년 동안 그들은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는데도 말이다.

종종 이 책을 열어본다. 겨우 15분, 20분이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있다. 호랑이가 그려진 담요를 널어둔 한겨울의 투막집이 있는 그 풍경 속에 말이다. 이정진 작가의 이 아름다운 책 덕분이다. 만약 무성의하게 만들어진 그저 그런 책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꺼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외딴섬에서 산삼을 찾아 산을 헤매는 심마니처럼, 내면의 평화와 위로와 매일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사진집을 찾아보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