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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첫 FTA인 RCEP 양국 관계 개선 출발점 삼자[광화문에서/이상훈]

입력 | 2022-02-09 03:00:00

이상훈 국제부 차장


이달 초, 일본 NHK 오후 9시 뉴스인 ‘뉴스워치9’에 세계 최대 다자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다룬 기획기사가 보도됐다. 이달 1일 한국에서 RCEP가 정식 발효된 것에 맞춘 기획이었다. 보도를 마무리하며 앵커가 미리 준비한 패널 하나를 들어 보였다. ‘정랭경열(政冷經熱)’ 네 글자가 쓰인 패널이었다.

외교적으로는 냉랭해도 경제 교류는 활발하다는 뜻의 한자어가 유난히 눈에 띈 건 작금의 한일관계, 글로벌 통상의 흐름과 결이 맞지 않아 보이는 생경함 때문이었다. 2019년 아베 신조 정권의 대한(對韓)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촉발된 무역 분쟁, 세계적 흐름이 된 글로벌 공급망 재편 움직임 등으로 정치-경제, 외교-무역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상호 종속변수가 됐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한일, 한중, 미중관계 등을 설명할 때 정형화된 수식어로 썼던 ‘정랭경열’은 미디어는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잊혀진 단어가 된 지 오래다.

외교관계 악화로 인한 양국 무역의 냉랭한 분위기는 숫자가 보여준다. 관세철폐율 97.9%의 세계 최고 수준 FTA를 맺으며 경제 동맹을 구축한 미국을 비롯해 56개국과 FTA를 발효하며 자유무역 지평을 넓혀 온 한국이지만 일본과는 분쟁이 격화돼도 새삼스럽지 않을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다. 2011년 1080억 달러(약 129조 원)로 정점을 찍은 한일 교역액은 이후 내리막을 그리며 2020년 711억 달러까지 줄었다. 일본에 한국은 물론이고 한국에 일본도 중국, 미국에 이은 세계 3위의 교역 상대국이지만 상호 간 무관세 품목 비중은 19%에 불과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외국인 신규 입국 규제 조치는 경제인들의 인적 교류마저 단절시켰다.

RCEP는 한일 경제 교류에 미력하나마 활기를 불어넣어줄 동력이다. 무엇보다 다자협정이긴 하지만 한일 간 첫 FTA라는 점에서 양국 모두 주목하고 있다. 품목 수 기준 관세 철폐 및 인하 품목이 40% 수준에 불과하고 그나마 최장 20여 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관세가 철폐·인하되는 낮은 수준의 FTA이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는 양국관계에 모처럼 등장한 교류 촉매제다.

한국에서 FTA는 때때로 논란의 중심에 있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교역 증대는 물론이고 상호 호감도를 높이며 교류와 협력을 넓히는 데 일조해 왔다. 한국 자동차와 세탁기, 칠레 와인, 독일 자동차, 미국 체리 등을 사고팔며 닦은 호혜관계는 경제 발전은 물론이고 글로벌 한류 확산의 토대가 됐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극단적 목소리를 높이는 양국 일부 정치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숨죽이고 있을 뿐,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일 양국 기업들의 협력은 조용하지만 내실 있게 유지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서 한일 간 경제 협력의 중요성은 싫든 좋든 커질 수밖에 없다. 최악의 한일관계를 단번에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RCEP 발효를 계기로 ‘정랭경열 시대로라도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나온다면 양국 관계 개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상훈 국제부 차장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