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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존중’ 첫발 디딘 정은경 청장의 마지막 소명[광화문에서/유근형]

입력 | 2021-12-01 03:00:00

유근형 정책사회부 기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2017년 7월 문재인 정부의 첫 질병관리본부장(질병관리청 전신)에 임명되던 날, 그는 전임자인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교수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 청장은 정 교수에게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하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주요 기관장의 교체는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정 청장은 전임자를 떠나보내는 걸 못내 아쉬워했다. 오히려 정 교수가 “최고 전문가가 임명돼 다행”이라며 정 청장을 위로했다.

그날 이후에도 정 청장은 정 교수에게 하루 수차례 문자를 보냈다. 전임자의 업무용 휴대전화를 물려받다 보니 정 교수를 수신인으로 한 메시지가 계속 날아든 것이다. 메시지가 적지 않았는데 정 청장은 일일이 ‘배달’했다. 정 교수는 “그만하라고 몇 번을 말해도 일주일 넘게 계속했었다. 정 청장은 안 보이는 일에도 성심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가 생각하는 정 청장의 모습은 국민들의 뇌리에 박힌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사람. 달변은 아니지만 팩트를 전달해주는 사람 등과 같은 이미지가 그렇다. 분식집, 도시락이 대부분인 그의 법인카드 내역이 화제가 되거나, 낡은 구두가 화제가 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질병청 관계자는 “직원들이 새 구두를 사다 줬는데도 정신이 없어서인지 신지 않더라.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은경 체제’ 4년 동안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기도 한다. 바로 전문가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방역당국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깔아뭉개는 식의 비판은 확연히 줄었다. 야당도 정 청장에 대한 공격만큼은 삼가는 분위기다. 방역은 과학의 영역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건조하지만 비정치적인 정은경의 언어가 ‘전문가 존중 문화’가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정은경 체제가 4년 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흔들리고 있다. 대선 탓인지 최근 방역정책이 정치논리에 좌지우지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어서다. 11월 1일 위드 코로나를 시작하며 “단계적 전환”을 주장했던 방역당국의 의견은 사실상 묵살됐다. 11월 29일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방역대책에도 방역당국이 주장한 강화책은 거의 반영되지 못했다.

정 청장이 내년 5월 새 정부 출범 후에도 ‘소신 있게 진심을 다한 청장’으로 기억되기 위해선 직을 걸고 대통령에게 고해야 한다. “오미크론 변이가 국내에 상륙하기 전에 방역을 강화해야 한다”, “백신 접종률 80%가 다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K방역 영웅’이란 수식어 뒤에 ‘문재인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영웅’, ‘과학적 근거만 제시하고 판단하지 않는 관료의 전형’이란 꼬리표가 따라붙을 것이다.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이 버틴 미국처럼 ‘전문가 중심 방역’이 더 뿌리내리기 위해서도 정 청장은 마지막 소명을 다해야 한다.


유근형 정책사회부 기자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