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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쑨원에 외교전, 국내외선 자금 모금…독립운동가들의 고군분투

입력 | 2021-11-04 14:31:00

단국대, 태평양회의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개최



독립운동가 신규식. 동아DB


“우리나라를 욕심을 낸 나라는 귀국이다. 귀국은 국제조약에 따라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독립 문제를 제출해주기 바란다.”

1921년 10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1879~1922)이 일본 시민단체들에 보낸 편지글 중 일부다. 동아시아 평화에 한국 독립이 필수인 만큼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태평양회의에서 논의하도록 시민단체들이 압박해달라는 것. 당시 국제사회에서 승인 받지 못한 임정은 일본 내 양심적 시민단체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태평양회의는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 9개국 대표들이 참석해 해군 군비축소와 아시아 태평양지역 평화문제를 논의했다. 최근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은 ‘태평양회의와 독립운동가들’ 학술회의를 열고 태평양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해 외교적 해법을 모색한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했다.

임정의 한국 대표단 파견이 결국 실패하고 태평양회의에서 한국 독립 문제도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념과 소속 단체를 막론하고 힘을 모아 회의를 성사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희곤 전 경북독립기념관장은 학술회의에 발표한 논문 ‘태평양회의와 신규식’에서 신규식이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을 상대로도 외교전을 펼쳤다는 것을 강조했다. 1921년 10월 12일에는 중국 광둥(廣東)성에서 수립한 쑨원(孫文·1866~1925)의 호법정부를 방문해 쑨원을 만났다. 신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태평양회의에 공동으로 대처할 것을 요청했다. 쑨원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광둥국회에서 한국독립승인안을 통과시켰으며, 신규식과 중한협회(中韓協會)를 설립해 태평양회의에 대한 한중의 요구조건을 전보로 제출했다.

독립운동가 홍진. 동아DB


신규식이 외교전을 펼칠 수 있던 배경에는 국내외 단체들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 김용달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태평양회의와 홍진’ 논문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홍진(1877~1946)을 조명했다. 홍진은 태평양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1921년 8월 13일 상해에서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외교후원회)를 결성해 대표단이 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어떤 나라든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자는 곧 우리의 적이다’는 선언서를 담은 홍보지 ‘선전’(宣傳)을 발행해 태평양회의 참가국들에게 한국 독립을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독립운동가 장형. 동아DB

국내에는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한국인 입학생 모집 임무를 수행했던 독립운동가 장형(1889~1964)이 있었다. 박성순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태평양회의와 장형’ 논문에서 장형이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할 자금을 모금했다고 설명했다. 상해에서 외교후원회가 조직되던 날 장형은 국내 경제인 단체였던 상공진흥회 회원 가운데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반도고학생친목회’(半島苦學生親睦會)를 조직했다. 외교후원회가 국내에 파견한 서무간사 여운홍(1891~1973)은 반도고학생친목회에 합류했고, 장형은 여운홍과 함께 국내에 태평양회의를 알리고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전국으로 순회강연을 다녔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