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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남의 몫 빼앗는 ‘부의 추출’은 상위 1%에게도 불리

입력 | 2021-05-22 03:00:00

◇불만 시대의 자본주의/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박세연 옮김/464쪽·2만3000원·열린책들




1월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의 한 공원에서 열린 ‘월가를 재점령하라(Reoccupy Wall Street)’ 시위에서 시위대 중 한 명이 금융자본의 공매도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 팻말을 들고 서있는 모습. 팻말에는 ‘금융인들의 마음처럼 날이 차갑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동아일보DB

미국 5대호 주변 공업지대를 일컫는 러스트벨트(Rust Belt). 그 일대 인디애나주 게리라는 공업도시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한 소년이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는 미국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불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종차별, 심각한 불평등, 노동쟁의가 만연한 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소년이 마주한 가슴 아픈 불평등의 모습들은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를 경제학도의 길로 인도했다. “불평등은 어릴 적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항상 더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 소년은 성장해 학자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 박사, 예일대 교수, 세계은행 부총재, 컬럼비아대 석좌교수, 대통령 경제고문, 노벨경제학상 수상까지. 경제학자로서 철저히 주류의 위치에 섰던 그는 “경제 시스템이 왜 그렇게 자주 무너지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천착하며 주류 경제 체제를 강하게 비판해왔다.

이번 저서도 그가 이어온 불평등 연구와 궤를 같이한다. ‘세계화와 그 불만’ ‘불평등의 대가’ ‘거대한 불평등’ ‘끝나지 않은 추락’ 등을 펴냈던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쯤 지난 2019년 초 이 책을 내놨다. 미국 경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서 점차 길을 잃고 있다고 보고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다. 저자는 ‘금융화(financialization)’가 지나친 상태에 이르렀고, 정부가 세계화에 대처하지 못했으며 시장의 지배력을 통제하지 못한 점들이 불평등을 심화시킨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트럼프 정부를 향해 “레이건 시절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과학이 아닌 자기 충족적 미신에 기반을 둔 경제 정책”을 쓴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불평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주류 경제 체제를 향해 쓴소리를 날리는 저격수 역할도 자처했다.

그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부를 가져오는 ‘부의 추출’이 아니라 ‘부의 창조’가 국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봤다. 부의 추출은 상위 1%에게도 궁극적으로 피해를 줄 것이라고 봤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사회 제도의 정비가 부를 창조할 토대라고 분석한 저자는 “공공사업을 확대하고 정부의 시장개입을 강화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의제를 21세기 형태로 결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물러난 뒤에도 세계 경제가 여전히 불평등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점을 떠올리면 그의 분석과 대안들은 여전히 가슴에 새길 만하다.

저자는 기존 저서처럼 미국 경제의 불평등 규모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의료제도, 노동법의 결함을 비판하며 정부의 개입 강화와 소득의 공정한 분배를 외친다. 그의 비판만 조목조목 열거해도 세계 경제가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든다. 하지만 그는 희망적 미래도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단, 자신이 지적한 문제들을 해결한다면 말이다.

“내가 제시한 의제는 미국이 직면한 재정적 한계 안에서 성취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모든 가구의 삶을 더 좋게 만들고 경제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 수 있다” 불평등과 불확실의 시대, 자신감과 확신으로 가득한 대학자의 말에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