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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김선미]럭비남

입력 | 2021-04-14 03:00:00


동물생태학자 야마네 아키히로는 “개인주의가 된 현대인들이 충직한 개보다는, 자유롭고 도도한 고양이의 모습에 공감한다”고 했다. 그는 이런 개인주의의 중심에 1인 가구와 MZ세대가 있다고 지목했는데,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할 수 있겠다. 럭셔리 제품을 즐겨 소비하는 비혼·비출산의 30대 남성인 ‘럭비남’이다.

▷1982∼1991년 태어난 럭비남은 명품 소비의 주축으로 떠오른 새로운 소비권력이다. 20년 전만 해도 한국 남성들의 초혼 평균 나이는 29.3세로 대개의 남성은 어린 자녀를 양육하느라 30대를 가족을 위해 바쳤다. 하지만 지난해 남성 초혼 평균 나이는 33.2세로 30대에도 결혼을 미루는 남성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은 오직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경향이 강한데 그 중심에 럭비남이 있다.

▷럭비남은 핵가족에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기애(愛)와 개인주의가 몸에 뱄다. 가정을 늦게 꾸리다 보니 여유롭게 자신을 위한 럭셔리 소비를 할 수 있다. 의상심리학에서는 이런 소비자를 ‘패션 에고이스트(패션 이기주의자)’라고 부른다. 럭비남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통해 패션을 정보로서 습득할 기회도 많다. 혼술 혼밥 혼영(혼자 영화) 혼캠(혼자 캠핑)에 이어 ‘즐거운 혼쇼(혼자 쇼핑)’가 가능해진 이유다. 애인과 동행하지 않고 나만의 안목에 따라 쇼핑을 한다. 한동안 여행 등 무형의 경험을 중시하던 소비가 코로나19를 맞아 럭셔리 제품에 집중되고 있다.

▷럭비남은 아티스트들과 활발하게 콜라보(협업)를 하거나 의식 있는 젊은 감각의 브랜드들을 선호한다. 특히 힘 빼고 플렉스(flex·자기 과시)하기 좋은 패션 아이템 중 하나가 스니커즈다. 값은 비싸도 구두를 잘 신지 않는 요즘 직장문화에서 편하면서도 폼 나기 때문에 오히려 가성비가 높다는 주장이다. 서울 강남의 ‘똘똘한 아파트 한 채’처럼 럭셔리 스니커즈가 ‘똘똘한 신발 한 켤레’라나. 남과 다른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빈티지나 한정판 제품도 주요 쇼핑 리스트다.

▷최근 경기 판교를 중심으로 기술 개발자들의 연봉이 크게 오르면서 ‘판교 럭비남’이 서울 럭셔리 매장들의 주된 손님으로 등극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주식시장이 좋으면 럭비남의 씀씀이도 커진다. 이들의 소비는 시장 파급효과도 일으켜 결혼해 아이가 있는 30대 남자와 20대 남자의 럭셔리 소비까지 늘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소비는 일종의 보복 소비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을 못 하는 데 대한 보복이요, 힘들게 돈 모아봤자 뛰어넘을 수 없는 ‘넘사벽’ 현실에 대한 보복이다. 자유롭고 도도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소비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