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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피라미드 세계… 24칸에 인류 역사 담아

입력 | 2021-03-26 03:00:00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 후보 ‘오페라’
꼭대기엔 왕좌, 밑바닥선 전쟁… 긴밀히 연결된 칸마다 인간상 반복
픽사 출신 에릭 오 감독 인터뷰
“다양한 얼굴색 흰색으로 칠한 장면, 다르단 이유로 벌어지는 탄압 표현”




에릭 오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오페라’는 피라미드로 압축된 세계에 인류의 역사를 담았다. 무지개색의 다양한 얼굴색이 흰색으로 칠해지는 장면에서는 다양성이 무시되는 차별을 표현했다. 비스츠앤네이티브스어라이크 제공

달이 해로 바뀌면 피라미드 세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꼭대기 왕좌에 앉은 이에게 사람들은 절을 한다. 결혼과 출산이 이뤄지는 반대편에서는 장례가 치러진다. 매춘과 도박, 음주도 벌어진다. 피라미드 가장 밑에서는 편을 가른 전쟁이 진행된다. 피라미드에 어둠이 찾아오지만 어김없이 날이 밝고, 사람들은 언제 세상이 멈추었냐는 듯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8분 44초 분량의 단편 애니메이션 ‘오페라’는 피라미드의 24개 칸 안에 결혼과 출산, 경제활동 같은 일상부터 테러, 인종차별, 재해, 전쟁 등 반복된 인류의 비극도 담았다. 한국계 미국인 에릭 오(오수형·37·사진) 감독은 이 작품으로 올해(93회)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아시아계 감독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수상 시 아시아계 감독으론 세 번째다. 미국에 있는 오 감독을 22일 화상으로 만났다.

얼굴이 흰색으로 칠해진 이들은 아래 칸으로 이동해 모두 같은 교육을 받는다. 피라미드의 상단에 위치한 권력자에게 많은 이들이 절을 하고 음식을 바치는 장면도 펼쳐진다. 비스츠앤네이티브스어라이크 제공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대학원에서 애니메이션 석사 과정을 밟았다. 2010∼2016년 픽사에서 ‘도리를 찾아서’ 등의 애니메이터로 활동했다. 2016년 픽사를 나온 그는 픽사 출신 동료들이 세운 애니메이션 제작사 ‘톤코하우스’와 협업해 오페라를 만들었다.

평단이 오페라에 주목한 이유는 기존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깼기 때문. 오페라에는 귀여운 캐릭터도, 명확한 기승전결의 서사도, 교훈도 없다. ‘졸라맨’을 연상케 하는 단순화된 인간들이 피라미드 안에서 바삐 움직이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주제 의식은 무겁다.

대자연을 상징하는 거대한 고래는 인간들에게 잡아먹히기도, 반대로 이들을 잡아먹기도 하며 인간의 자연 파괴, 그에 대한 자연의 반격을 표현했다. 비스츠앤네이티브스어라이크 제공

“픽사는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곳입니다. 픽사가 안 하는 것, 나만 할 수 있는 것, 형식을 파괴하는 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2017년 미국에선 트럼프 대통령 취임, 한국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벌어졌습니다. 정치색과 상관없이 사회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고 ‘역사는 진화하는가, 반복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 하루하루 느끼던 좌절감이 합쳐져 오페라가 탄생했습니다.”

오페라는 볼수록 새롭다. 반복해서 보면 놓쳤던 인물들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각기 따로 노는 것 같았던 24개 칸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알게 된다. 오 감독은 벽에 화면을 영사해 반복적으로 작품을 상영하는 방식의 전시를 계획 중이다.

“사회 시스템이 그렇듯 피라미드 안 모든 공간이 상하, 좌우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아이가 나르는 음식이 꼭대기의 왕까지 전달되는 식이죠.상하는 계급을 의미하고, 좌우는 삶과 죽음, 이성과 감성, 좌파와 우파 등 상충되는 개념을 담았습니다.”

24칸의 인간 군상 중에서도 오 감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은 빨주노초파남보로 다양한 인간들의 얼굴색을 누군가 흰색으로 칠해 버리는 장면이다.

“단순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탄압하는 인간상을 표현했습니다.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부터 최근 이어지는 아시안 혐오 범죄까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일은 우리 삶에서 반복해 벌어지고 있어요.”

그의 차기작은 1월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된 가상현실(VR) 애니메이션 ‘나무(NAMOO)’다. 아카데미상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미나리’처럼 한국어를 그대로 따 온 제목이다. 10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영감을 받아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을 담은 자전적 이야기다.

“관객이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캐릭터가 뛰어다니는 걸 보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오는 걸 맞으며 체험하는 애니메이션입니다. 사람들이 에릭 오를 떠올렸을 때 틀을 깨는 시도를 하는 감독으로 그려지고 싶습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